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4화: 피로 맺은 족쇄
다음 날 오후, 에블린은 다시 발레리우스의 철문 앞에 섰다.
전날보다 차가운 바람이 성벽을 훑었다. 철문 위의 까마귀들은 울지도 않았다. 마치 성 전체가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로웬은 굳은 얼굴로 소개장도 받지 않은 채 성문 앞에 나와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에블린의 얇은 장갑과 작은 가방을 차례로 훑었다.
"돌아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내일 오라 하셨잖아요."
에블린은 성문 너머를 바라봤다.
"약속을 어기면 제안도 가벼워 보일 테니까요."
로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길을 열었다.
성 안의 공기는 하루 사이 더 차가워져 있었다. 복도 벽을 타던 검은 금은 예배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에블린은 그 틈마다 숨은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굶주린 뿌리처럼 돌 아래를 더듬는 감각이었다.
폐예배실의 문이 열리자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흐린 빛이 쏟아졌다. 빛은 제단 앞을 덮은 검은 가시에 잘게 찢겨 있었다.
세드릭은 제단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는 전날보다 짙은 문양이 번져 있었다. 에블린은 그 손을 보고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기다렸습니까?"
"아니."
세드릭이 짧게 답했다.
"네가 오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그 말과 달리 그의 눈 밑에는 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에블린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시험은 어떻게 하죠?"
세드릭은 제단 바닥을 가리켰다. 돌 위에는 오래된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저주는 내 피를 먹고 자란다. 네가 그 입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네 말을 믿겠다."
로웬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전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않은 계약이 어디 있지?"
세드릭은 검은 단검을 들어 손바닥을 그었다.
피가 제단 위로 떨어졌다.
첫 방울이 돌에 닿자 검은 가시가 일제히 솟구쳤다.
에블린의 숨이 막혔다. 타는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와 검은 줄기의 마찰음이 겹쳤다. 화형대의 불길이 눈앞을 핥는 듯했다.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로웬 경. 제가 멈추라고 하면 전하의 피부터 막아 주세요."
"영애께서 쓰러지시면요?"
"그때도요."
세드릭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에블린은 품에서 장미 씨앗 세 알을 꺼냈다. 손끝을 베어 피를 묻히자 딱딱한 껍질이 갈라졌다. 붉은 뿌리가 차가운 돌 위로 미끄러졌다.
검은 가시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살을 긁으며 피를 삼켰다.
통증이 팔을 타고 올랐다. 손끝부터 힘이 빠졌다.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마.
대신 네가 원하던 곳으로 가.
에블린은 붉은 뿌리를 검은 줄기 사이로 밀어 넣었다. 뿌리는 세드릭의 피가 스민 돌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피를 향해 입을 벌린 검은 가시의 줄기를 하나씩 감쌌다.
생명력은 물처럼 흘렀다.
에블린은 저주를 밀어내지 않았다. 가시가 뜯어 먹는 힘의 길목을 씨앗 쪽으로 돌렸다. 씨앗 안에 남은 미약한 생명력이 검은 가시의 허기를 받아 냈다.
가시가 더 세게 조여 왔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가시 바로 위를 눌렀다.
"그만둬."
"아직 아닙니다."
"네 피도 먹고 있다."
"알아요."
에블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 제 힘이 무엇인지 이제 믿으시겠죠. 저는 없는 생명을 만들지 못해요. 이미 있는 것을 옮길 뿐입니다."
그녀는 마지막 씨앗을 자신의 피 위에 떨어뜨렸다. 붉은 뿌리가 한꺼번에 솟아 검은 가시의 밑동을 감았다.
쾅.
예배실 바닥이 낮게 울렸다.
검은 가시가 몸을 뒤틀었다. 에블린의 손목을 물던 끝도 잠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무릎이 꺾일 만큼 강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지금 물러나면 세드릭은 자신을 신전의 정화사들과 같은 부류로 판단할 것이다. 필요할 때만 손을 내밀고 대가가 보이면 등을 돌리는 사람.
에블린은 그런 거래 상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가져가."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내게서 가져가진 마."
붉은 뿌리가 가시의 속을 파고들었다. 검은 줄기는 먹이를 좇아 몸부림쳤으나 곧 씨앗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단 위의 피는 더 번지지 않았다. 세드릭의 손등을 타고 오르던 문양도 손목 아래에서 멈췄다.
마른 씨앗 세 알이 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에블린은 제단을 짚고 겨우 몸을 세웠다. 손목에는 얕은 상처와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몸속에서는 힘을 너무 많이 잃은 식물처럼 텅 빈 감각이 들었다.
세드릭은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다만 바로 옆에 서서 검은 가시가 다시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의 어둠을 눌러 두었다.
"네 말이 맞았군."
그가 낮게 말했다.
"저주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바꿔야 한다."
"잠깐뿐입니다."
에블린은 피 묻은 손목을 감쌌다.
"씨앗이 마르면 다시 배고파질 거예요. 제가 제 피를 계속 먹이로 내놓을 생각도 없고요."
세드릭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이제 계약을 말해 봐."
로웬은 예배실 문가에서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세드릭은 에블린 앞에 손을 내밀었다. 검은 문양이 손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내 이름을 빌리겠다고 했지. 어느 정도까지?"
"로젠버그를 포함해 제가 지정한 적을 상대할 때요. 대공가의 병력을 사병처럼 쓰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에블린은 피가 묻은 장갑을 다시 끼지 않은 손을 내려다봤다.
"필요할 때 당신의 이름으로 문을 열고 당신의 칼로 한 번을 베는 것. 그 정도면 됩니다."
"내 칼은 명령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빌린다고 했어요."
에블린은 세드릭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까지 시키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주가 폭주하면 제 부름을 거절하지 마세요."
"네가 내 저주를 부를 수도 있겠군."
"그럴 수 있다면 당신도 제 피를 부를 수 있겠죠."
세드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깨고 로웬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전하. 피의 계약은 서로의 피를 저주에 닿게 합니다. 이분이 배신하면 전하의 저주가 이분의 피를 먼저 물 겁니다."
"알아요."
에블린이 답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조건을 정하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저주를 해방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저는 그분의 피를 해치지 않아요. 전하도 제 피와 제 가족에게 직접 칼을 겨누지 마세요."
세드릭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가족을 지키겠다는 말로는 들리지 않는군."
"지금 죽어 버리면 제가 갚아 줄 사람이 줄어드니까요."
처음으로 세드릭의 입가에 웃음과 닮은 기색이 번졌다.
"좋아."
그가 말했다.
"계약하는 동안 내 피가 불안해지면 네 손목의 문양이 울릴 거다. 네가 내 피를 부르면 나도 알게 되겠지. 서로의 자리를 알려 주는 표식은 아니다. 다만 피가 위험을 느낄 때만 닿는 감각이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합니다."
세드릭은 단검을 에블린에게 건넸다.
"그럼 네 피로 서명해."
에블린은 망설이지 않고 손바닥을 얕게 그었다. 세드릭도 같은 자리에 칼날을 댔다.
두 손이 맞닿았다.
따뜻한 피와 차가운 피가 섞였다.
바닥의 붉은 뿌리가 두 사람의 손목을 향해 기어올랐다. 검은 가시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붉음과 검음이 서로를 삼키려다 손목 안쪽에 가느다란 고리로 남았다.
에블린의 귓가에서 낯선 맥박이 뛰었다.
쿵.
그것은 자신의 심장과 다른 박자였다.
세드릭의 눈도 순간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피의 계약을 맺는다."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예배실에 울렸다.
"내 저주가 폭주할 때 네가 그 굶주림을 묶는다. 네가 내 이름과 칼을 요구할 때 나는 사유를 듣고 거절하지 않는다."
에블린이 이었다.
"누구도 상대를 소유하지 않는다. 계약을 깨는 쪽은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른다."
두 사람의 피가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손목의 고리가 뜨겁게 조여 들었다가 이내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계약은 끝났다.
세드릭이 먼저 손을 놓았다. 그의 손등의 검은 문양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지 않았다.
"네가 부르면 듣겠다."
그가 말했다.
"단 네가 내 칼을 빌린 날에는 네가 무엇을 베려는지 내게 보여라."
"보여 드리죠."
에블린은 손목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당신도 제게 숨기지 마세요. 저주가 당신을 얼마나 먹고 있는지."
세드릭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서 멎었다.
"명령인가?"
"거래 상대에게 하는 확인입니다."
"대담한 거래 상대군."
성문 밖에는 에블린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이미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다.
로웬이 마차 문을 열며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빨리 피의 계약을 허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그분을 이용하려 들면 대공가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에블린은 마차 발판에 한 발을 올렸다.
"저는 이용한다고 말했어요. 전하도 저를 이용할 겁니다."
로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말이 전하를 상처 입히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에블린은 대답 대신 손목을 가렸다. 검은 고리의 끝에 붉은 선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그 순간 낯선 맥박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세드릭의 피였다.
예배실의 저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존재를 알린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에블린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로젠버그 저택에는 여전히 자신을 도구로 보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그들의 문을 열 수 있는 이름과 필요할 때 빌릴 칼이 생겼다.
다음에는 성 밖의 괴물이 아니라 저택 안의 사람들부터 골라 내야 했다.
누가 돈에 굶주렸는지.
누가 충성에 목말랐는지.
그리고 누가 에블린의 손을 잡을 만큼 절박한지.
마차가 검은 성을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손목 아래의 고리가 조용히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