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2화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2화: 성녀의 가시관

신성 측정식장은 눈이 시릴 만큼 희었다.

푸른 촛불이 흔들렸다. 바닥 한가운데에는 검은 측정석이 놓여 있었다.

에블린은 그 돌을 보자마자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저 앞에서 이사벨라는 성녀가 되었다. 자신은 보이지 않는 배터리가 되었다.

"늦었구나."

백작이 낮게 말했다.

그는 딸의 안색보다 드레스 색을 먼저 보았다. 검은 드레스와 붉은 입술. 흐릿한 장식품이어야 할 에블린이 오늘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오늘은 이사벨라가 주인공인 날이다. 괜한 행동으로 시선을 끌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에블린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순종처럼 보이되 굴복으로는 보이지 않게.

백작의 옆에 선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독을 꿀물에 타서 먹이는 얼굴이었다.

"에블린. 오늘 네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단다. 이사벨라가 떨지 않도록 곁에서 붙들어 줘. 네가 언니니까."

백작 부인의 손이 에블린의 손목을 감쌌다. 다정한 얼굴과 달리 그 손길은 명령이었다.

네 것을 내놓아라. 가문을 위해. 동생을 위해.

에블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네. 오늘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백작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손을 놓았다. 그녀는 에블린이 그 말에 어떤 칼날을 숨겼는지 알지 못했다.

홀 끝에서 이사벨라가 대신관 마르틴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와 물기 어린 눈동자가 완벽했다.

로젠버그가 오늘 팔아 치울 그림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언니."

이사벨라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에블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와 줘서 고마워. 나 너무 무서워. 혹시 아무 빛도 안 나오면 어떡하지?"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증인들 앞에서 보이기에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불안이었다.

에블린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손이 감옥 창살 사이로 들어와 마지막 조롱을 속삭였다. 저 눈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에블린은 동생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내가 네 곁에 있을게."

이사벨라의 어깨가 놓였다. 백작 부인도 안도한 듯 웃었다.

에블린은 곧장 대신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신관님. 의식 절차를 여쭈어도 될까요?"

마르틴이 고개를 들었다. 은발이 성화의 푸른 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말씀하십시오."

"보조자가 의식에 참여하면 그 사실도 신전 증명서에 남습니까? 절차를 어기면 이사벨라에게 누가 될까 걱정되어서요."

백작의 손가락이 지팡이 머리를 한 번 두드렸다.

마르틴이 답했다.

"필요하다면 남길 수 있습니다. 보통은 성녀 후보자의 이름만 적습니다만 안정 보조가 있었다면 별도 주석을 달 수 있지요."

"그렇군요."

에블린은 아주 작게 웃었다.

"가문의 중요한 날입니다. 작은 의심도 남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블린."

백작이 낮게 불렀다. 경고가 섞인 목소리였다.

에블린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는 그저 이사벨라를 위한 절차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증인들의 시선이 백작에게 향했다.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첫 번째 고리였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사벨라는 측정석 앞에 섰다. 하얀 손이 검은 돌 위에 얹혔다. 대신관이 신전의 기도문을 읊었다. 향로의 연기가 천천히 기둥처럼 솟았다.

홀 전체가 숨을 죽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측정석은 여전히 어두웠다. 푸른 촛불만 돌 표면에 흔들릴 뿐이었다.

이사벨라의 입술에서 색이 빠졌다. 백작 부인의 미소가 굳고 귀족 증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다시."

백작이 짧게 말했다.

대신관은 기도문을 다시 읊었다. 이사벨라는 손을 더 세게 눌렀지만 돌은 침묵했다.

과거의 에블린은 여기서 무너졌다.

동생이 창피를 당할까 두려웠고 아버지의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만큼 어리석게 자기 힘을 덜어 주었다.

백작 부인의 시선이 에블린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말보다 정확했다.

지금.

에블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사벨라. 숨을 천천히 쉬어."

그녀는 동생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소매 안쪽에는 방을 나서기 전 화분에서 떼어 온 장미 씨앗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에블린은 엄지손톱으로 손끝을 살짝 눌렀다. 피 한 방울이 씨앗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생명력이 깨어났다. 오래 잠든 뿌리가 물을 찾듯 아주 가늘고 끈질긴 흐름이 손바닥 아래로 뻗었다.

다 주지 않는다.

먹이가 될 만큼만.

그리고 목줄은 반드시 내 손에.

측정석 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금가루 하나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곧 빛은 맥박처럼 뛰더니 이사벨라의 손목을 감싸고 얇은 고리로 번졌다.

"오오."

누군가 숨을 삼켰다.

검은 돌 위로 금빛 꽃잎 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귀족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빛이 났어."

이사벨라가 멍하니 속삭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안도와 탐욕이 동시에 번졌다. 그 빛이 자기 것이라 믿는 얼굴이었다.

에블린은 친절하게 그 착각을 깨 주지 않았다.

대신관 마르틴만은 측정석에서 눈을 떼지 않고 빛의 흐름을 살폈다.

"기이하군요."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무엇이 기이하다는 말입니까?"

"신성력은 분명 나타났습니다. 다만 흐름이 일반적인 발현과 다릅니다. 근원과 매개가 완전히 겹치지 않는 듯합니다."

이사벨라가 에블린의 손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어린 손가락에 숨은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에블린은 그 손을 다정히 감싸며 말했다.

"제 동생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긴장하면 숨이 흐트러지곤 하지요. 제가 곁에서 안정시킨 탓에 흐름이 복잡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사벨라의 힘은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다.

마르틴은 에블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심보다 흥미가 더 짙었다.

"안정 보조라."

"제가 괜한 일을 한 것이라면 벌을 받겠습니다. 다만 이사벨라가 너무 떨고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에블린은 고개를 숙였다. 언니의 헌신은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방패였다.

마르틴은 잠시 침묵한 뒤 선언했다.

"이사벨라 폰 로젠버그 양에게 신성력 발현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초기 흐름이 불안정하므로 에블린 폰 로젠버그 양의 안정 보조가 있었음을 증명서에 함께 기록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백작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홀의 공기가 또 한 번 멈췄다.

에블린은 놀란 듯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신전의 기록이 분명해야 이사벨라에게도 이롭습니다. 오늘의 축복에 흠집이 생기지 않으려면 대신관님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백작은 그 안에 감춰진 벽을 보았을 것이다.

거부하려면 이사벨라의 신성력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이면 에블린의 이름이 공식 기록에 남는다.

백작은 이빨을 악문 채 미소 지었다.

"물론이다. 가문은 언제나 신전의 판단을 존중하지."

두 번째 고리였다. 손바닥 안의 씨앗에서는 미세한 가시가 자라기 시작했다.

측정식은 축하 속에 끝났다. 사람들은 이사벨라를 둘러싸고 축복의 말을 쏟아냈다. 백작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고 백작은 오래 준비한 미소로 귀족들의 악수를 받았다.

에블린은 홀 가장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축하를 건네지 않았다. 에블린의 이름이 증명서에 남는다는 사실을 들었으면서도 그녀를 보조 장식처럼 지나쳤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백작은 에블린을 서재로 불렀다.

문이 닫혔다. 축하의 소음이 두꺼운 벽 너머로 사라졌다. 백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벗겨졌다.

"오늘 네 행동은 경솔했다."

"이사벨라를 도왔을 뿐입니다."

"네 이름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대신관님이 흐름을 의심하셨습니다. 안정 보조였다고 기록하지 않았다면 의심은 이사벨라에게 향했을 겁니다."

백작은 말을 멈췄다. 분노가 곧 계산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늘 그랬다. 딸의 쓸모는 정확히 셌다.

백작 부인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결과가 좋았으니 됐어요. 에블린이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던 셈이지요."

에블린은 쓸모라는 단어를 오래 씹었다. 녹슨 쇠와 피가 섞인 맛이었다.

"앞으로도 이사벨라의 힘이 안정될 때까지 네가 곁에 있어야겠다."

백작이 말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너도 기쁘겠지."

"물론입니다."

에블린은 순순히 답했다.

"다만 준비가 필요합니다."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준비?"

"이사벨라의 신성력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안정 보조를 맡으려면 조용히 기도하고 약초를 다룰 공간이 필요합니다. 서쪽 온실을 허락해 주세요."

"온실을?"

"식물은 정화 의식에 도움이 됩니다. 신전에서도 성수와 약초를 함께 쓰지 않습니까."

에블린은 한 가지를 더 얹었다.

"그리고 신전의 정화 의뢰 목록을 열람하게 해 주세요. 이사벨라의 첫 공식 행보를 제가 먼저 살피겠습니다."

백작은 한참 동안 그녀를 보았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판단을 했지?"

"오늘 깨달았습니다."

에블린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동생에게 도움이 되려면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요."

백작의 입가에 만족이 스쳤다. 그는 에블린이 마침내 더 유용한 도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받아들인 듯했다.

"좋다. 서쪽 온실과 목록 열람을 허락하마. 대신 네가 할 일은 분명하다. 이사벨라를 빛나게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세 번째 고리였다.

에블린은 서재를 나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하녀들은 그녀를 보며 속닥거렸고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지금은 그 침묵이 편했다.

그날 밤 신전 의뢰 목록 사본이 에블린의 방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서류 몇 장쯤 주저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촛불 아래에서 종이를 넘겼다.

병든 마을의 우물 축복.

남부 수도원의 약초밭 복구.

귀족가 예배당 정화.

하나같이 그럴듯하고 안전했다. 백작이라면 그중 하나를 고를 것이다. 박수는 크고 위험은 적은 길.

에블린은 마지막 장에서 손을 멈췄다.

검은 봉인이 찍힌 의뢰서였다.

발레리우스 대공가 저주 정화 후보 파견 요청.

위험 등급 최상. 자원자 없음. 재검토 보류.

에블린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발레리우스 대공.

제국의 사신. 저주받은 전쟁 영웅. 황태자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신전마저 발을 빼는 남자.

회귀 전의 에블린은 그를 소문으로만 알았다. 그때는 두려운 이름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로젠버그를 무너뜨리려면 가문 안의 작은 칼만으로는 부족하다. 황실이 함부로 꺾지 못하는 더 위험한 칼이 필요하다.

에블린은 손바닥을 폈다. 낮에 품고 있던 장미 씨앗이 놓여 있었다. 피를 머금은 껍질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붉은 뿌리가 돋아 있었다. 뿌리 끝에는 벌써 작은 가시가 맺혔다.

이사벨라의 가시관은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블린에게는 그 가시관을 씌울 손이 더 필요했다.

그녀는 발레리우스 대공가 의뢰서 위에 손을 올렸다.

"가장 위험한 남자부터 찾아가자."

촛불이 흔들렸다. 검은 봉인 위로 에블린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