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시놉시스
가문과 약혼자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가짜 성녀'로 낙인찍혀 화형당한 에블린. 죽음의 문턱에서 5년 전으로 회귀한 그녀는 더 이상 착한 딸도, 헌신적인 약혼녀도 되지 않기로 한다. 스스로 복수를 위한 '진짜 흑막'이 되어 제국을 뒤흔드는 그녀와, 그녀의 발치에 기꺼이 목줄을 바친 '저주받은 대공' 세드릭의 치명적인 복수 로맨스 판타지.
1화: 화형대의 불꽃은 따뜻했다
뜨거웠다.
살을 파고드는 불길이, 뼈를 녹이는 열기가 차라리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블린 폰 로젠버그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저마다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광기, 그리고 일말의 쾌락이 서려 있었다. 제국의 성녀라 칭송받던 여인이 순식간에 마녀로 몰려 타 죽어가는 모습은 그들에게 최고의 볼거리였다.
"마녀를 죽여라! 가짜 성녀 에블린을 처단하라!"
"어떻게 성녀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우리 이사벨라 님을 해치려 한 독사 같은 년!"
하늘을 찌르는 욕설들이 고막을 때렸다. 에블린은 결박된 팔다리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거친 밧줄은 파고들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무 기둥에 묶인 채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불길은 이미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집어삼킨 뒤였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돌을 던지는 저 사내. 에블린의 아버지, 로젠버그 백작이었다. 그는 딸의 죽음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수치라며 침을 뱉었다. 그의 눈에는 자식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이 거대한 스캔들을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남은 '진짜 성녀' 이사벨라를 통해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겠다는 계산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 에블린의 이복동생 이사벨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하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가련한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에블린은 똑똑히 보았다. 손수건 뒤에 감춰진 입술이 비릿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언니, 미안해. 하지만 성녀는 한 명이면 족하잖아? 가문의 축복도, 황태자 전하의 사랑도 전부 다 내 거야. 언니는 그냥 조용히 타 죽어주면 돼.'
어젯밤 감옥으로 찾아온 이사벨라가 속삭였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에블린은 그녀를 위해 제 신성력을 나누어 주었고, 그녀가 저지른 모든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그것이 가족을 위한 길이라 믿었으니까. 계모의 구박 속에서도,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도 에블린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 더 희생하면, 조금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신을 봐줄 것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시절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마지막으로, 단상 위에서 무심하게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남자. 나의 약혼자이자 이 제국의 황태자, 루카스 제르망.
그는 에블린의 눈과 마주치자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때 영원을 맹세했던 입술은 이제 그녀의 처형을 승인하는 칙령을 읽어 내렸을 뿐이었다. 그는 에블린의 힘을 이용해 정적들을 숙청하고 황권을 공고히 했다.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는 거추장스러운 에블린을 버리고, 더 '다루기 쉬운' 이사벨라를 선택했다.
"아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연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불길이 허벅지를 지나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신경이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 에블린은 웃었다. 피 섞인 웃음이 입가로 흘러나왔다.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 기도를 단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 없는 무심한 당신이 만약 내 마지막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기회를 주소서.
저들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비틀 수 있는 기회를.
내가 흘린 피보다 더 진한 피눈물을 저들이 흘리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지켜온 모든 선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악이 얼마나 달콤한 파멸을 가져오는지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이번 생은 실패했다. 하지만 만약 다음이 있다면…….
나는 결코 성녀가 되지 않으리라.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마녀보다 더 독하고, 당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악마보다 더 잔인해지리라.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인하며, 가장 완벽한 흑막이 되어 저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리라.
불길이 시야를 완전히 덮쳤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한 순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정적이 찾아왔다. 뜨거웠던 열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몸을 휘감던 고통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어둠 속으로 침잠하며 에블린은 마지막까지 저들을 저주했다.
"……린? 에블린! 정신 차리렴!"
누군가 어깨를 거칠게 흔드는 감각에 에블린은 번쩍 눈을 떴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아닌,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살을 태우던 불길 대신 보드랍고 고급스러운 실크 침구의 감촉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금박 장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상에, 식은땀을 이렇게나 흘리고. 악몽이라도 꾼 거니?"
익숙한 목소리. 에블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로젠버그 백작 부인. 에블린을 괴롭히고 차별하던 계모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회귀 전 기억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에블린을 보며 짓는 가증스러운 미소 또한 여전했다.
"……어머니?"
"그래, 얘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이사벨라의 신성 측정식이 있는 날이란다. 네가 옆에서 잘 보조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니. 네 신성력이 조금이라도 이사벨라에게 도움이 된다면 가문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아니겠느냐."
이사벨라의 신성 측정식.
에블린의 머릿속에 번개라도 친 듯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이었다. 이사벨라에게 신성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에블린이 자신의 힘을 몰래 나누어 주어 그녀를 '성녀'로 만들어 주었던 날. 모든 비극의 서막이었던 그날.
이후 이사벨라는 성녀로 추앙받으며 모든 영광을 누렸고, 에블린은 그녀의 그림자이자 힘을 공급하는 배터리처럼 소모되다가 결국 '가짜'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졌다.
에블린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화상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가느다란 목줄기도, 결박되었던 손목도 깨끗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로젠버그 저택의 정원은 5년 전 봄의 모습 그대로였다. 화창한 햇살 아래 핀 꽃들이 마치 비극 따윈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다.
'돌아왔어.'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이것이 죽기 직전의 주마등이라 할지라도, 에블린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단 한 번의 기회. 신이 내린 것인지 악마가 내린 것인지 모를 이 기회를 에블린은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앳된, 하지만 눈동자 속에는 화형대의 불꽃보다 더 뜨거운 증오를 품은 소녀가 웃고 있었다.
"네, 어머니. 잊을 리가요. 동생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입니다."
에블린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서늘했다. 평소처럼 순종적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백작 부인은 왠지 모를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지만, 에블린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내딛고 있었다.
"어머, 얘. 목소리가 왜 그러니?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오히려 몸이 아주 가볍네요. 이제야 제 자리가 어디인지 깨달은 기분이라서요."
에블린은 화려한 화장대 앞에 앉아 브러시를 집어 들었다. 평소엔 수수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붉은색 립스틱을 골라 입술에 발랐다. 마치 핏빛을 머금은 듯한 치명적인 색깔이었다.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성녀의 가면 뒤에 숨어 당신들의 숨통을 천천히 조여줄, 가장 완벽한 흑막이.
먼저, 오늘부터 시작해보자. 이사벨라, 네가 그토록 원하던 그 '성녀'의 자리가 얼마나 뜨거운 가시방석인지 알려줄게.
네가 성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내 신성력? 줄게. 얼마든지. 하지만 그 대가는 네 영혼이 될 거야.
에블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속삭였다.
"잘 봐, 아버지. 그리고 이사벨라. 당신들이 만든 괴물이 어떻게 당신들을 집어삼키는지."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에블린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 자락이 마치 화형대의 연기처럼 바닥을 휩쓸며 따라왔다.
복도를 지나는 에블린의 발소리는 규칙적이고 단호했다. 평소라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걸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주치는 하녀들이 놀라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에블린 아가씨……?"
"오늘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셔. 저 드레스는 또 언제 준비하신 거지?"
하녀들의 수군거림이 등 뒤로 들려왔지만 에블린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즐거웠다. 로젠버그 저택의 대리석 바닥은 차가웠고, 복도를 타고 흐르는 공기는 신선했다. 화형대의 그 끔찍한 열기 대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서늘한 감각이 온몸을 일깨웠다.
계단 앞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거울 속에는 이전의 수수하고 유약했던 에블린은 없었다. 붉은 입술과 서늘한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제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 손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줄을 쥐게 될까.
"가자, 나의 지옥으로."
에블린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화려하게 장식된 신성 측정식 장소에는 이미 그녀를 파멸로 이끌었던 가족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에블린 폰 로젠버그가 '흑막'으로서 내딛는 첫 번째 무대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