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6화: 랩실의 흔적
밤사이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그쳤지만, 한낮의 공기는 마치 젖은 솜처럼 무겁고 끈적거렸다.
도윤은 벌게진 눈으로 대학 캠퍼스를 걸었다. 스피커 너머로 들었던 그 끔찍한 파열음과 비명, 그리고 가짜 도윤의 섬뜩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마저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세상은 평화로웠지만, 도윤의 세상은 이미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어이, 도윤! 정신 안 차려?"
교내 매점 앞 파라솔 의자에서 샌드위치를 씹던 과 동기 민우가 도윤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어제부터 얼굴색이 흙빛이다. 박 교수님이 졸업 데모 엄청 쪼아대서 그래?"
"아…… 어. 잠을 좀 못 자서."
"임마, 건강 챙기면서 해. 이번에 대성전자 인턴 추천서 네가 유력하니까 다들 시샘하는 건 아는데, 몸 망가지면 다 허사다. 오늘 밤엔 랩실에서 밤샘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
"어…… 고맙다. 그럴게."
도윤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랩실이 있는 제3공학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벽돌의 건물이 마치 거대한 관처럼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 속 어딘가에 자신이 열어버린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오후 내내 도윤은 멍한 상태로 조교와 박 교수의 지시를 따랐다. 졸업 작품 예비 평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도윤의 손끝은 덜덜 떨렸고, 머릿속은 온통 자취방 구석에 박아둔 싱크로 장치와 다른 차원의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랩실의 마지막 대학원생들이 퇴근했다.
"도윤아, 가방 챙겨라. 불 끈다."
"아, 형. 저 논문 참고 자료 정리할 게 좀 남아서요. 10분만 있다가 나갈게요."
"그래? 문단속 잘하고 가라."
털컥.
문이 닫히고 랩실에 어둠이 찾아왔다. 도윤은 긴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광등 스위치를 켜자, 랩실 안이 차가운 백색광으로 채워졌다.
도윤은 캐비닛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제 오후에 넣어두었던 공간 왜곡 유도용 헬름홀츠 코일 장치가 보관되어 있었다. 기계를 수거해 자취방의 싱크로 장치와 함께 아예 파괴해 버리거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이 위험한 장치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코일 장치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은 도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
장치의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 어제 퇴근하기 전, 도윤은 코일을 랩실 공구함 오른편에 밀착시켜 수납했었다. 하지만 지금 장치는 수납함 중앙으로 나와 있었고, 검은색 전원 케이블이 단정하게 감겨 있던 모습과 달리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캐비닛 바닥에 널려 있었다.
도윤은 침을 삼키며 기계를 꺼내 들었다.
장치가 묵직한 무게감을 전해왔다. 기계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던 도윤은 더 큰 위화감을 발견했다.
장치 후면의 방열판(Heat Sink)에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미지근한 열이 피부로 느껴졌다. 기계가 아주 최근까지 구동되었다는 명백한 물리적 증거였다.
"누가 켠 거지? 민아가 만졌나? 아니면 다른 조원들이?"
그럴 리 없었다. 이 코일 장치는 전용 펄스 발생기를 연결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도윤만의 개조품이었다. 일반 대학생들이 매뉴얼도 없이 구동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도윤은 다급하게 제어판 디스플레이의 설정 전압 값을 확인했다.
OLED 화면에 떠 있는 세팅값은 도윤이 입력해 둔 것이 아니었다.
[ FREQ_MOD: 842.115 THz ]
[ PHASE_SHIFT: -0.01% ]
[ OUTPUT_POWER: MAX ]
정확히 어젯밤, 싱크로 장치를 통해 도윤이 감지했던 그 Beta 차원의 주파수와 0.01%의 왜곡 상수값, 그리고 강제로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설정이었다.
그때, 도윤의 시선이 실험대 바닥으로 향했다.
기계 발판 아래의 흰색 타일 바닥에 젖은 진흙먼지가 떨어져 있었다. 점토처럼 끈적거리고 어두운 붉은빛을 띤 흙이었다.
도윤은 손끝으로 흙을 살짝 찍어 냄새를 맡았다. 습한 비린내와 함께 묘하게 낯설고 매캐한 화약 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쪽 차원의 서울 도심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공업 지역이나 개간지에서나 나올 법한 붉은 진흙이었다.
그 붉은 흙먼지 위에는 선명한 발자국 문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윤은 자신의 운동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270mm 사이즈, 국내에서 가장 흔하게 팔리는 에스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 바닥 패턴. 흙 위에 찍힌 무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하지만 도윤은 오늘 붉은 흙이 있는 곳을 밟은 적이 없었다. 어제 비가 왔지만 이 근처 골목길은 전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뿐이었다.
"설마……."
도윤의 등 뒤로 소름 끼치는 오한이 일었다.
어젯밤 가짜 도윤이 차원 좌표를 완전히 고정했다고 선언했던 그 순간, 싱크로 장치만이 아니라 이곳 랩실에 있던 헬름홀츠 코일 장치 역시 반응했던 것이다. 0.01%의 미세한 균열을 뚫고, 저쪽 차원의 붉은 흙과 가짜의 발자국 흔적이 이쪽으로 물리적으로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바닥을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손전등 앱을 켜고 구석진 틈새를 비추었다.
캐비닛 모서리 틈새에 무언가 찢어진 종이 쪼가리가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윤은 핀셋을 가져와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피 묻은 영수증 조각이었다.
붉고 검은 핏방울이 말라붙어 거칠어진 종이 조각에는 낯선 로고와 함께 거친 인쇄 문구가 남아 있었다.
[ 성송24 신촌점 ]
[ 오성 담배 1갑 - 5,000원 ]
[ ……리점 할인 -200원 ]
글씨체와 영수증의 레이아웃은 도윤이 자주 가던 편의점과 비슷했지만, '성송24'의 엠블럼 모양이 미세하게 달랐고, 담배의 브랜드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저쪽 차원의 피 묻은 살인마가 남긴 결정적인 물리적 증거였다. 그는 이미 이 랩실의 좌표를 인지하고 있었고, 차원의 장벽을 넘어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이 랩실 어딘가의 빈 공간 속에서 0.01%의 틈을 비집고 도윤을 노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스스스스-.
갑자기 랩실 천장의 환풍기 스위치에서 미세한 마찰음이 들렸다.
도윤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실험실 구석, 환풍기 팬이 평소와 달리 불규칙한 회전 소리를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빈 책상과 벽면 사이의 공기가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처럼 굴절되며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파지직, 툭.
아주 미세한 스파크 소리와 함께, 랩실 안의 모든 형광등이 일시에 번쩍이며 꺼져버렸다. 완전한 암흑이 방 안을 덮쳤다.
어둠 속에서, 도윤은 들었다.
자신이 서 있는 실험대 바로 뒤편에서, 축축하게 젖은 운동화가 바닥 타일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를.
터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