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4화: 붉은 흔적
민아가 돌아간 뒤, 텅 빈 실험실에 홀로 남은 도윤은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이질적인 물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은행 명칭이 박힌 붉은 볼펜, 그리고 발행 연도가 미래로 각인된 방향이 반대인 100원짜리 동전.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쓸어내릴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은 마치 현실이라는 단단한 지반이 서서히 붕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소리만 건너오는 게 아니야. 완벽하게 물질이 이동했어."
이것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쓸 만한 위대한 발명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마음속에 차오른 것은 학문적 성취감이 아닌, 심연을 들여다볼 때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경고'
스피커 너머의 또 다른 자신이 뱉었던 살인마라는 단어. 그 단어가 심장에 박힌 가시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도윤은 기계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저쪽 차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만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단순히 청각적 정보에만 의존해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저쪽 세계의 시각적 정보를 획득할 방법을 고민했다.
'싱크로'의 양자 동조 신호는 초고주파 테라헤르츠 대역의 전자기 왜곡을 동반한다.
도윤은 랩실 구석에 굴러다니던 구형 스마트폰과 열화상 카메라 모듈을 싱크로 장치에 연동했다. 무선 전파의 위상차와 중력 미세 굴절 정보를 역추적하여, 전자기적 노이즈를 2차원 흑백 이미지로 렌더링하는 간이 스캔 프로그램을 급히 코딩했다.
빛이 굴절되는 정도를 역산하여 카메라 렌즈 없이도 공간의 윤곽을 스캔해내는 일종의 '양자 홀로그래피 감지기'였다.
작업을 마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도윤은 랩실 장비들을 대강 정리한 뒤, 싱크로 장치와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원룸 자취방의 불을 끄자, 창밖의 가로등 불빛만이 빗방울을 머금은 유리창을 통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도윤은 싱크로 장치의 스위치를 켜고 스마트폰의 수신 앱을 구동했다.
지이이잉-.
양자 동조 코일이 돌며 미세한 진동이 책상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스마트폰 화면에 검은색 배경과 함께 노란색 노이즈 스펙트럼이 어지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SYNCING COORDINATES... ]
[ DIM_INDEX: 1.0001 ]
[ IMAGE RENDERING... ]
도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했다. 다이얼을 천천히 돌려 주파수의 미세 파형을 고정하자, 화면에 나타난 점묘화 같은 노이즈들이 서서히 뭉치며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백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거칠고 노이즈 낀 이미지였다.
화면에 나타난 공간은 익숙했다. 도윤이 사는 자취방 건물 앞의 골목길이었다. 전신주와 갈라진 아스팔트 바닥, 그리고 낡은 쓰레기 수거함의 윤곽이 자글자글한 노이즈 속에서 기이하게 렌더링되고 있었다.
치지직, 툭.
스피커에서 빗속을 거칠게 달리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 헉, 헉, 헉……!
거친 숨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 속 골목길 끝에서 한 남자의 형체가 나타났다. 남자는 빗속을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화면의 해상도가 낮아 얼굴은 흐릿했지만, 남자의 체형과 걸음걸이, 그리고 입고 있는 셔츠의 실루엣은 의심할 여지없이 도윤 자신이었다.
"나야…… 저쪽의 나야."
도윤은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몸을 기울였다.
그때, 골목길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좀 더 명확하게 스캔되었다.
도윤은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화면 속 Beta 차원의 임도윤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그 셔츠의 앞부분과 양쪽 소매는 흑백 화면에서도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짙고 어두운 액체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액체는 빗물에 씻겨 내리며 셔츠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였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누군가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거나 사람을 난도질했을 때 튀는 튀어 오른 붉은 흔적임이 분명했다.
더욱 기괴한 것은 그의 오른손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뭉툭하고 길쭉한 금속 재질의 흉기가 들려 있었다.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 흉기의 끝에서도 짙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후우…… 후우…… 씨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가짜 도윤의 목소리는 광기와 절박함에 사로잡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도윤이 있는 원룸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가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역동적인 음파 피치와 진동이 싱크로의 센서에 고스란히 잡혔다.
도윤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액정을 뚫어지라 보았다.
남자가 3층 복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302호, 자신이 있는 방과 정확히 같은 좌표의 문 앞에 도달했다.
화면 속에서 남자는 피 묻은 손으로 다급하게 도어락을 눌렀다.
띠띡, 띠띡, 띠띠띡.
실제 현실의 도윤의 현관문 도어락은 조용했지만, 스마트폰 화면과 스피커 속에서는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와 거칠게 문을 닫고 빗물과 피가 섞인 옷을 바닥에 벗어던졌다.
- 하아…… 하아…….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스피커 너머로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가 들려왔다. 피를 씻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윤은 소름 끼치는 공포감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0.01%의 벽 너머에서,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채 방 안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 있다. 이 좁은 방의 공간 안에서 두 명의 자신과 피비린내가 공존하고 있다는 시각적, 청각적 충격은 도윤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화장실 물소리가 멈췄다.
남자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방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 속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방 한구석, 진짜 도윤이 싱크로 장치를 설치해 둔 바로 그 책상 위치였다.
화면 속 흑백의 가짜 도윤이 책상을 빤히 응시했다. 해상도가 낮았지만, 그의 두 눈에 서린 서늘하고 섬뜩한 안광은 모니터를 뚫고 진짜 도윤의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피 묻은 오른손이 허공으로 뻗어 나왔다. 마치 화면 너머의 진짜 도윤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의 손이 싱크로 장치의 좌표가 위치한 공간을 더듬기 시작했다.
스피커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한층 가깝게 울렸다.
- ……거기 있지?
도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 네가 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냄새가 나. 다른 세계의 냄새.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위로 호선을 그리며 찢어졌다.
- 가지러 갈게. 그 장치.
도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 앱을 강제 종료하고 싱크로의 전원 플러그를 거칠게 뽑아 버렸다.
툭.
화면이 꺼지고 스피커가 조용해지자, 방 안에는 다시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땀과 한기로 범벅이 된 채 자취방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그는 깨달았다. 저쪽 차원의 또 다른 자신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살인마였고, 이제 자신이 연 차원의 틈새를 통해 이쪽 세계로 넘어오려고 표적을 정한 침입자였다.
도윤은 타들어 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타버린 기판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주파수는 맞춰졌고, 붉은 흔적은 경계를 넘어 도윤의 일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