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3화: 건너온 물건
"하아…… 하아……."
도윤은 자취방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손에 쥔 싱크로 장치는 이미 전원이 꺼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 안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현관문 너머를 귀가 찢어질 정도로 경청해보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발자국 소리도, 기괴한 혼잣말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0.01%의 어긋남. 그것은 문 하나를 마주하고도 서로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절대적인 다차원의 벽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스피커 너머의 그 사내, 즉 다른 차원의 '임도윤'이 자신이 머물던 방 안에서 '진짜 도윤'의 존재감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했다는 사실을.
'방 안에 왜 내 냄새가 나지?'라던 그 낮고 서늘한 중얼거림이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해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도윤은 단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언제라도 문을 박차고 또 다른 자신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불합리한 공포가 그를 꽁꽁 묶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빗줄기는 한층 가늘어졌지만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회색빛이었다.
도윤은 퀭한 눈으로 제3공학관 412호 실험실로 향했다. 전날 밤 가방에 쑤셔 넣었던 타버린 부품들과 새로 구입한 소자들을 실험대 위에 펼쳐놓았다. 도윤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신호만 건너오는 게 아니라면?'
어젯밤의 동조 현상은 단순한 소리의 송수신을 넘어섰다. 기계가 작동하는 순간, 방 안의 전자기장이 왜곡되었고, 미세하게나마 공간이 일렁였다. 이는 전자기파뿐만 아니라 중력이나 미립자 수준의 물리적 영향력이 차원의 틈새를 통해 간섭을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즉, 전송 가능한 한계치를 넓힌다면 물질 자체를 건너오게 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도윤은 실험실 구석에 있는 가변식 헬름홀츠 코일(Helmholtz coil)을 가져왔다. 강한 자기장을 균일하게 형성해 주는 장치였다. 그는 싱크로 장치의 안테나 출력을 코일에 연결하여 왜곡 영역을 인위적으로 확장하는 개조를 시작했다.
오후 2시가 지날 무렵, 개조가 끝났다.
도윤은 실험실 구석의 CCTV 카메라 렌즈를 조심스럽게 책과 서류 상자로 가렸다. 혹시라도 모를 물리적 이상 현상이 기록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헬름홀츠 코일 중앙의 빈 공간에 파란색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그리고 싱크로 장치의 전원을 켰다.
윙-.
장치가 가동되며 코일 주변의 공기가 웅웅거리는 저음의 진동을 내기 시작했다. OLED 화면의 수치들이 빠르게 변화했다.
[ SYSTEM STABLE ]
[ TARGET DIM_INDEX: 1.0001 ]
도윤은 조심스럽게 주파수 다이얼을 돌렸다. 코일 중앙의 공간이 마치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광등 빛이 그 공간을 통과할 때 미세하게 굴절되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조금만 더…… 신호 세기를 3데시벨만 올리자."
그가 싱크로의 증폭 노브를 아주 미세하게 비틀었다.
파지직!
순간, 날카로운 정전기 스파크가 코일 중앙에서 튀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코일 안의 공간이 찰나의 순간 검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윤은 눈을 비비고 코일 안을 들여다보았다.
"……!"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코일 중앙에 놓여 있던 파란색 모나미 볼펜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전혀 다른 물건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빨간색 볼펜이었다.
도윤은 떨리는 손을 뻗어 빨간색 볼펜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미세한 열기를 머금고 있는 플라스틱의 촉감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볼펜의 측면에는 하얀색 글씨로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 한성은행 신촌지점 개점 기념 ]
도윤의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세계에서 신촌에 있는 그 대형 은행의 이름은 '한서은행'이었다. 한성은행이라는 금융기관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윤이 올려둔 것은 분명 파란색 잉크의 펜이었는데, 건너온 것은 빨간색 잉크의 펜이었다.
양자 역학적 위치는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물질적 정보가 미세하게 뒤바뀐 다른 차원의 물건이 공간을 건너온 것이었다.
"이게…… 진짜로 가능한 일이었어."
도윤은 붉은 볼펜을 쥔 채 넋을 잃었다. 그가 우연히 만든 기계는 단순한 무선 수신기가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 사이에 임시 통로를 개방하는 물질 전송 장치였던 것이다.
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코일 위에 올렸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의 극성을 주어 다른 물건을 끌어오기로 했다.
다이얼을 한 칸 더 돌리자, 다시 한번 공기가 일렁이며 파지직 소리가 났다.
코일 위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이 튕겨 나가듯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다른 동전이 툭 떨어졌다.
도윤은 동전을 집어 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동전의 앞면에는 익숙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새겨져 있었지만, 영정이 바라보는 방향이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발행 연도는 무려 '2028년'으로 적혀 있었다.
"시간선마저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건가……?"
도윤이 동전을 빛에 비추어 보며 중얼거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달칵.
"임도윤. 너 거기서 혼자 뭐 해?"
실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민아가 들어왔다. 도윤은 깜짝 놀라 100원짜리 동전과 빨간 볼펜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황급히 뒤로 숨겼다.
민아는 양손에 일회용 커피 컵을 든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도윤의 등 뒤에 숨겨진 손과,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헬름홀츠 코일, 그리고 작동 중인 싱크로 장치로 향했다.
"커피 사 왔는데…… 너 아까부터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뭐 신기한 거라도 보고 있었어?"
"어? 아냐, 아무것도. 그냥 필터 데이터 분석하다가 혼잣말 좀 한 거야."
도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싱크로 장치의 전원을 껐다. 웅웅거리던 코일의 진동이 가라앉았다.
민아는 걸어와 도윤의 곁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거짓말 마. 네 표정 완전 도둑질하다 들킨 어린애 같은데? 그리고 등 뒤에 숨긴 거 뭐야? 보여줘 봐."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니면 왜 숨겨? 얼른 손 펴봐."
민아가 장난스럽게, 하지만 집요하게 도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윤은 당황하여 손을 빼려 했으나, 민아의 손가락끝에 밀려 손아귀에 쥐고 있던 물건들이 책상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또르르 굴러간 100원짜리 동전과 붉은색 볼펜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 노출되었다.
민아는 눈을 찡그리며 책상 위의 물건들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뭔데 그래? 그냥 볼펜이랑…… 어?"
민아의 손가락이 동전의 표면을 만지다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야, 이 동전 뭐야? 왜 모양이 이래? 발행 연도가 2028년……? 그리고 이순신 장군 방향도 반대잖아. 이거 위조동전이야? 아니면 무슨 굿즈 같은 거야?"
"아, 그거…… 그냥 인터넷에서 특이해서 산 모조품이야. 수집용 장난감 같은 거."
도윤은 급히 변명하며 동전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민아는 동전을 높이 들어 올리며 도윤의 손을 피했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이 이번에는 빨간 볼펜으로 향했다.
"한성은행? 야, 우리나라에 한성은행이 어딨어. 한서은행이겠지. 너 진짜 이상한 거 수집한다? 근데 아까 네가 기계 켜고 나니까 이게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았는데……."
민아는 책상 위의 코일 장치와 동전을 번갈아 보며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도윤과 3년 동안 랩실을 같이 쓰며 그의 사소한 습관과 표정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였다. 도윤의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리 없었다.
"임도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요즘 밤새면서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 거야? 이거 졸업 작품용 회로가 아니잖아."
"민아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개인적인 호기심에 이런 위조품들을 기계로 만들어내기라도 한다는 거야?"
민아의 질문은 뼈를 찔렀다. 도윤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평행 우주와 차원 이동 장치를 발명했다고 말한다면 민아가 믿어줄 리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민아의 호기심 어린 집요한 시선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일단 지금은 비밀로 해줘. 부탁이다, 민아야."
도윤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자, 민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동전과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좋아. 대신 나중에 꼭 설명해야 해. 요새 너 진짜 딴사람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민아는 가방을 챙겨 실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도윤은 겨우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그는 책상 위의 빨간 볼펜을 내려다보았다.
기막힌 발명의 기쁨도 잠시, 문득 머릿속에 어젯밤 들었던 가짜의 경고가 스쳤다.
'그놈이 날 쫓아오고 있어. 당장 그 기계를 꺼.'
만약 자신이 다른 차원의 물건을 끌어온 것처럼, 저편 세계의 무시무시한 존재 역시 이 통로를 통해 자신들이 있는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면?
도윤은 빨간 볼펜을 쥐고 있는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경계의 균열은 이미 조용히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