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2화: 0.01%의 오차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문 틈새로 새어 들 때쯤에야 도윤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실험실 바닥은 차가웠고,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플라스틱 탄내와 납 연기 냄새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 공기 중에 맴돌고 있었다. 도윤은 삐걱거리는 관절을 억지로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 인가?"
도윤은 멍한 눈으로 실험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잔혹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이었다. 시커뎄게 타버린 콘덴서 회로, 쩍 갈라진 과부하 방지 칩셋, 그리고 전원이 꺼진 채 묵묵부답인 오실로스코프 화면. 손끝에는 기판을 만지다 그을린 검은 수트가 묻어났다.
꿈이 아니었다. 분명 어젯밤, 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것은 도윤 자신의 목소리였다.
'당장 그 기계를 꺼…… 그놈이 냄새를 맡았어…….'
귓가에 맴도는 환청 같은 속삭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다급함, 겪어보지 못한 극도의 공포가 서린 목소리. 진짜 자신이 겪은 일인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갑자기 고요한 실험실에 울려 퍼진 요란한 기계음에 도윤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놀라 자빠질 뻔했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이었다. 액정에는 지도 교수인 '박용태 교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
도윤은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임도윤입니다."
- 도윤아, 졸업 작품 진척은 좀 어떠냐? 다음 주에 1차 데모 검사가 있는 건 알고 있지?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막바지 필터 튜닝 단계입니다."
- 그래. 네 프로젝트가 통과해야 우리 랩실 이름으로 대성전자 인턴십 연계도 매끄럽게 진행된다. 지난번 올린 기획서 보니까 공간 노이즈 상쇄율을 대폭 올리겠다고 큰소리쳤던데, 기대하고 있으마. 펑크 내지 말고.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속된 일정까지 반드시 완성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자 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성전자 인턴십. 학자금 대출과 동생의 학원비로 쪼들리는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동줄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일어난 괴현상은 그의 모든 계획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도윤은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타버린 회로 기판을 신문지에 꽁꽁 싸서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대학원생들이 출근하기 전에 흔적을 지워야 했다. 다행히 방 안의 탄내는 창문을 열어 환풍기를 세게 돌리자 서서히 옅어졌다.
그는 가방을 둘러메고 제3공학관을 나섰다. 밤새 내리던 비는 보슬비로 바뀌어 대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도윤이 향한 곳은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오래된 전자기기 상가인 '용성전자상가'였다.
세월의 때가 찌든 붉은 벽돌 건물과 미로처럼 얽힌 좁은 통로마다 납땜 냄새와 오래된 구리 부품 냄새가 섞여 풍겼다. 현대식 빌딩들 사이에 섬처럼 남겨진 이곳은, 도윤이 희귀한 아날로그 소자를 구할 때마다 즐겨 찾는 비밀기지 같은 곳이었다.
"아저씨, 여기 있는 10마이크로패럿 고압 커패시터랑 고주파 발진 다이오드 몇 개만 주세요. 그리고 이 사양에 맞는 대역 차단 필터 칩도요."
"학생, 요즘은 이런 아날로그 소자 잘 안 쓰는데? 다 디지털 칩 하나로 퉁치지 않나?"
좁은 매대 안쪽에서 먼지 쌓인 상자를 뒤적이던 주인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부품들을 건넸다.
"아날로그가 손맛이 있어서요. 필터링 감도를 미세하게 조절하기에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도윤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부품 값을 치렀다. 가방 안의 부품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어젯밤의 회로를 어떻게 복구하고 개선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이 과학과 공학을 공부하는 자의 억누를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자 집착이었다.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내 목소리가 흘러나온 거지? 만약 그게 단순한 전자기 왜곡이 아니라면?'
도윤은 자취방인 낡은 다세대 주택 원룸으로 돌아와 곧바로 작업대를 세팅했다. 한 평 남짓한 좁은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작업대에는 소형 인두기와 실납, 멀티미터, 그리고 부품 보관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어젯밤 타버린 장치의 설계도를 컴퓨터 모니터에 띄웠다.
단순히 노이즈를 지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젯밤 우연히 맞물렸던 그 특이한 주파수 대역을 '고정'하고, 신호의 증폭률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회로의 열화 현상을 막으려면 입력 단에 능동 리미터 회로를 추가해야 돼. 그리고 과부하가 걸리기 전에 전원을 차단하는 안전장치도 필요해."
도윤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인두기를 쥐었다. 연청색 실납이 녹아내리며 매캐하고도 중독적인 냄새를 풍겼다.
이번에는 장치의 형태도 바꿨다. 들고 다니기 불편한 오실로스코프 대신, 소형 128x64 해상도의 OLED 디스플레이 모듈을 기판에 결합했다. 전체 크기는 손바닥만 한 휴대용 아날로그 라디오 크기로 압축했다. 겉보기에는 오래된 군용 무전기나 조잡한 라디오처럼 보였지만, 내부에는 초고주파 신호를 동조하는 최첨단 양자 소자들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정밀하게 제어되고 있었다.
작업을 마쳤을 때는 이미 밖이 어둑어둑해진 밤 9시였다.
도윤은 완성된 기기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 기기의 우측에는 주파수를 미세 조정할 수 있는 알루미늄 다이얼 노브가 장착되어 있었다.
도윤은 이 장치를 마음속으로 '싱크로(Synchro)'라고 명명했다.
딸깍.
장치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작은 OLED 디스플레이에 푸른색 텍스트가 떠올랐다.
[ SYSTEM INITIALIZING... ]
[ FREQUENCY SCANNING... ]
스피커에서 낮게 깔리는 백색 소음이 울렸다. 도윤은 땀이 밴 손으로 조심스럽게 우측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머릿속에 각인된 그 주파수 대역. 842.115 테라헤르츠(THz). 일반적인 광학 전자기파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기이한 영역이었다.
치지직…… 치직…….
디스플레이의 파형 그래프가 거칠게 춤을 추었다. 다이얼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튜닝하자, 소음 사이로 미세한 규칙성을 가진 양자 노이즈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디스플레이 하단에 실시간으로 연산되는 위치 좌표 데이터가 출력되었다.
[ LAT: 37.5842 ]
[ LON: 127.0256 ]
[ ALT: 120.4m ]
[ DIM_INDEX: 1.0001 ]
도윤은 숨을 멈추고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위도(LAT) 37.5842와 경도(LON) 127.0256.
그것은 현재 도윤이 앉아 있는 이 한서대 인근 원룸 자취방의 실제 지리적 좌표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했다. 고도(ALT) 역시 건물의 3층 높이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표시된 수치, 'DIM_INDEX'가 문제였다.
도윤이 사전에 임의로 설정한 기본 공간 차원 차폐 상수는 1.0000이었다. 즉,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차원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 기계가 수신하고 있는 공간의 지표는 1.0001을 가리키고 있었다.
"0.01%의 오차……."
도윤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낮게 내려앉았다.
소수점 넷째 자리의 미세한 왜곡. 공간 좌표와 지리적 위치는 완전히 겹쳐 있지만, 물리적 진동수가 0.01% 어긋난 다른 세계. 공간은 같으나 차원이 다른 상태를 의미했다.
그것은 도윤이 논문에서 이론으로만 접했던 '양자 평행 우주'의 실존을 가리키는 명백한 물리적 증거였다.
스르륵…… 치지직.
마침내 다이얼이 고정되자, 스피커의 잡음이 완전히 여과되었다. 스피커 너머에서 기이한 백색 소음과 함께 어떤 공간의 소리들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윤은 스피커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 딸깍.
무언가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였다. 이어서 바스락거리는 종이 봉투 소리, 그리고 영수증을 찢는 듯한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 칠천 오백 원입니다. 포인트 적립 하세요?
- 아뇨, 괜찮습니다. 카드로 할게요.
도윤은 눈을 크게 떴다.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중 하나는 편의점 점원의 것이었고, 카드를 건네며 답하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어젯밤 들었던 '또 다른 임도윤'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투는 일상적이고 평온했다. 어젯밤 비명을 지르며 기계를 끄라고 소리치던 절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감사합니다.
- 안녕히 가세요.
이어 편의점 특유의 웰컴 벨소리가 울리고, 삑 하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거세게 섞여 들었다. 사내의 거친 발자국 소리가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 바닥을 튀기며 나아가는 소리가 잡혔다.
도윤은 땀으로 젖은 손으로 싱크로 장치를 꽉 쥐었다.
"지금…… 편의점에 간 건가?"
도윤은 홀린 듯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밤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윤의 자취방 골목길 바로 모퉁이를 돌면 '성송24' 편의점이 있었다.
만약 저 수신음이 진짜 평행 우주의 신호라면, 지금 0.01%의 오차를 가진 다른 차원의 임도윤은 바로 저 모퉁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와 함께 사내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 하아, 비 진짜 지긋지긋하게 오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혼잣말.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과 싱크로의 신호 강도가 완벽한 동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 도윤의 방이 있는 건물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계단 밟는 소리.
동시에, 도윤이 있는 실제 자취방 건물의 복도 계단에서도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터벅.
실제 현실의 발자국 소리와 스피커 너머 평행 우주의 발자국 소리가 기묘한 엇박자를 그리며 겹쳐졌다.
도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로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현관문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두 발자국 소리가 마침내 도윤의 방 앞, 302호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스피커 너머에서는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가 들렸다.
- 철컥.
현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스피커 너머에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도윤은 거울을 마주 보듯 현관문 앞에 우뚝 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의 자신과 0.01% 어긋난 차원의 또 다른 자신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피커 너머의 사내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비닐봉지를 뒤적이던 소리도, 거친 숨소리도 일순간에 끊어졌다.
그리고 지독한 정적 속에서, 스피커 너머의 사내가 낮게 읊조렸다.
- ……어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 방 안에…… 왜 내 냄새가 나지?
도윤은 반사적으로 싱크로 장치의 스위치를 내려 전원을 차단했다.
뚝.
완벽한 어둠과 침묵이 방 안을 덮쳤다.
하지만 도윤은 알고 있었다. 문 너머의 그 존재가, 자신이 있는 이 세계의 흔적을 눈치챘음을.
0.01%의 오차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 아니었다. 언제든 엉켜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의 도화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