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시놉시스
한서대학교 전자전기공학부 3학년 임도윤. 졸업 작품을 위해 전자기 노이즈 제거 장치를 개발하던 중, 우연히 미세한 차원의 경계를 찢고 다른 차원의 신호를 가로채는 기계 '싱크로(Synchro)'를 발명하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차원의 자신을 관찰하고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된 장난이었으나, 화면 너머의 자신이 끔찍한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하며 상황은 급변한다.
급기야 본래 세계에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수사망을 좁혀오던 소시오패스인 'Beta 차원의 임도윤'이 기계의 신호를 역추적해 Alpha 차원으로 넘어온다.
도윤의 외모, 목소리, 지문, 심지어 과거의 기억까지 완벽하게 복제한 가짜 임도윤은 도윤의 일상과 인간관계, 가족을 빼앗고 진짜 도윤을 살인 용의자로 몰아 파멸시키려 한다.
누명과 억압, 그리고 붕괴하는 시공간 속에서 도윤은 자신의 삶을 되찾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자신과의 처절하고도 지능적인 사투를 시작한다.
1화: 노이즈 속의 목소리
쿠르릉, 쾅!
먼 하늘에서 천둥이 낮게 울렸다. 창문 유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그 틈새로 눅눅한 흙 내음과 습한 바람이 실험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한여름 밤의 장마는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지고 있었다.
한서대학교 제3공학관 412호, 대학원 공동 실험실.
이곳은 낮에는 수십 명의 학생들로 붐비는 곳이었지만, 밤 11시 45분이 지난 지금은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아, 제발…… 한 번만 제대로 나와라."
임도윤은 메마른 입술을 깨물며 노란색 오실로스코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벌써 사흘째 밤샘이었다. 턱밑에는 거뭇한 수염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고, 휑뎅그렁한 두 눈 아래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책상 한구석에는 다 마신 종이컵 세 개가 믹스커피 찌꺼기를 머금은 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도윤이 개발 중인 졸업 작품의 명칭은 '가변 주파수 변조를 통한 전자기 왜곡 및 능동 노이즈 상쇄 장치'.
거창한 이름과 달리,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정교하게 배치된 아날로그 회로 기판과 구리선이 촘촘하게 감긴 소형 인덕터, 그리고 각종 커패시터들이 어지럽게 납땜된 낡은 플라스틱 상자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 장치는 유입되는 미세한 전자기 잡음을 상쇄하여 완벽하게 깨끗한 신호를 출력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화면에 나타난 파형은 일직선을 유지하기는커녕, 정체불명의 불규칙한 고주파 노이즈로 채워져 끊임없이 톱니바퀴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기판에 연결된 간이 오디오 스피커에서 신경질적인 백색 소음이 방 안을 채웠다. 도윤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디가 문제지? 신호 증폭단 회로 설계는 완벽한데. 입력 신호 차폐가 덜 된 건가? 아니면 빌딩 지하에 있는 고압 변전실에서 전자기 간섭이 밀려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졸업 작품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주일. 이 프로젝트가 통과하지 못하면 대기업 연구소로의 인턴 연계는커녕 졸업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평범한 흙수저 대학생인 그에게 이번 졸업 작품은 인생의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실험실 문이 열렸다.
"어? 너 아직도 안 갔냐?"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털어내며 들어온 사람은 과 동기이자 랩실 동료인 강민아였다. 질끈 묶은 머리에 편안한 후드티 차림의 그녀는 캐비닛에서 가방을 꺼내며 도윤을 흘겨보았다.
"벌써 12시 다 돼 가. 너 그러다 전시회 날 쓰러져서 응급실 간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라."
"이것만…… 이 신호만 잡고 들어가려고. 왜 자꾸 출력 단에서 기괴한 주파수가 잡히는지 모르겠어. 아날로그 필터를 몇 개나 덧댔는데도 소용이 없네."
도윤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민아는 그의 책상 위로 걸어와 회로 기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특이하네. 노이즈 파형이 보통 백색 소음이랑은 좀 다른데? 주기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어떤 오디오 신호가 찌그러져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여."
"오디오 신호? 이 주파수 대역은 일반 라디오나 통신 주파수가 아니야. 테라헤르츠(THz) 영역에 가깝다고. 애초에 대학 실험실 수준의 간이 안테나로 수신될 수가 없는 대역인데……."
"글쎄, 네가 회로 설계를 너무 괴랄하게 해서 공간 왜곡이라도 일어난 거 아니야?"
민아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시계를 보았다.
"난 먼저 간다. 차 끊기겠다. 너도 얼른 불 끄고 나와. 경비 아저씨 순찰 돌 시간 다 됐어."
"어, 먼저 가. 나도 이것만 끄고 정리할게."
"그래, 내일 봐."
문이 닫히고, 실험실은 다시 고요함 속에 잠겼다. 창밖의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도윤은 민아가 흘리듯 한 말을 곱씹었다. '오디오 신호가 찌그러져서 들어오는 것 같다.'
그는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납땜 인두기를 쥐었다. 그리고 회로 기판의 가변 콘덴서 값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일반적인 신호 간섭이 아니라, 외부의 특정 주파수가 기판 자체의 인덕턴스와 반응하여 공진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면?
도윤은 멀티미터의 프로브를 회로의 발진단에 대고 오실로스코프의 스윕 속도를 올렸다.
파르르르.
노란색 선이 찰나의 순간 극도로 촘촘하게 좁혀지더니, 무작위로 날뛰던 노이즈가 특정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서서…… 히…….
스피커에서 나던 날카로운 파찰음이 잦아들었다. 대신,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터지는 듯한 기묘하고 먹먹한 음향이 흐르기 시작했다. 도윤의 손끝이 떨렸다. 본능적인 호기심이 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는 장치에 달린 아날로그 대역 통과 필터(Bandpass Filter)의 손잡이를 극도로 미세하게 돌렸다.
1밀리미터, 아니, 0.1밀리미터 단위의 정밀한 조작이었다.
지이잉-.
순간, 오실로스코프 화면의 파형이 깨끗한 정현파에 가깝게 정렬되었다. 동시에 스피커에서 흐르던 노이즈가 완전히 사라지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소리였다.
후우…… 하아…… 후우…….
아주 가깝고, 명확한 인간의 호흡 소리. 마치 누군가가 스피커 바로 앞에 입을 대고 숨을 쉬고 있는 듯한 생생한 입체감이 차가운 실험실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도윤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실험실 안에는 자신뿐이었다. 이 소리는 100% 기계 내부의 출력 단에서 흘러나오는 전자기 신호였다. 누군가 무선 마이크를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근처 다른 연구실의 무전 신호가 혼선된 걸까?
하지만 이 건물의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 벽과 지하실의 전기적 차폐 장치를 생각하면 무선 신호가 이토록 깨끗하게 유입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주파수는 일반적인 통신 대역이 아니었다.
"누구…… 세요?"
도윤은 홀린 듯 스피커를 향해 중얼거렸다.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기계는 송신기가 아닌 수신기였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 스피커 너머의 호흡 소리가 뚝 멈췄다.
어두운 방 안의 적막이 극도에 달했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마저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기괴한 대치 상태였다. 스피커 너머의 존재가 마치 도윤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윽고, 아주 느릿하고 음산한 목소리가 노이즈 섞인 음성으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쿵.
도윤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단순히 소리가 들려서가 아니었다. 찌그러지고 갈라진 노이즈 너머로 들려오는 그 음색, 단어와 단어 사이의 미묘한 억양, 그리고 호흡의 리듬이 소름 끼치도록 친숙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혹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주파수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임도윤,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말도 안 돼."
도윤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의자를 뒤로 팹하며 뒤로 물러섰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도윤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층 더 선명하고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 거기 누구야? 대답해. 내 개인 서버 주파수에 어떻게 접속한 거지? 너 학과 조교야? 아니면 경찰이야?
도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고, 극도의 경계심과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그 목소리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도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너…… 너 누구야? 내 목소리로 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도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피커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헛바람을 들이켜는 듯한 기괴한 신음이 들려왔다.
- ……너, 설마.
"누구냐고 묻잖아! 이 해킹 프로그램 뭐야? 민아가 시켰어? 동기들이 몰카라도 하는 거야?!"
도윤은 책상을 짚고 기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기판 어디에도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된 칩셋은 없었다. 이 기계는 철저히 오프라인으로 작동하는 아날로그 공진 회로일 뿐이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고, 믿기 힘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 목소리…… 나잖아? 너 이름이 뭐야.
"뭐?"
- 이름이 뭐냐고 묻잖아! 너 임도윤이지?
순간 실험실의 불이 깜빡였다. 천장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불안하게 빛을 잃었다가 다시 켜졌다. 기판 위의 소형 트랜스포머에서 가느다란 백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윤은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내가 임도윤인데…… 너는 누구야?"
- 아, 결국 성공한 건가? 기어코 다른 쪽 세상을 찾아낸 거야?
스피커 너머의 '임도윤'이 기괴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평소 도윤이 결코 짓지 않을, 서늘하고 광기 어린 소리였다.
- 잘 들어, 임도윤. 지금 당장 그 기계를 꺼. 주파수 동조를 멈추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그놈이…… 그놈이 냄새를 맡았어. 내가 차원 좌표를 열어둔 탓에 그 연쇄살인마 놈이 날 쫓아오고 있다고! 당장 그 기계를 끄지 않으면, 그놈이 너한테 갈 거야!
"살인마? 차원 좌표? 대체 무슨……!"
- 당장 꺼! 회로를 다 태워버리라고! 으아아아악!
수신 장치 너머로 갑작스러운 폭음이 들려왔다. 쇠파이프가 바닥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과 비명, 그리고 유리창이 거칠게 박살 나는 소리가 스피커를 찢어발길 듯 흘러나왔다.
"야! 야! 무슨 일이야!"
도윤이 다급하게 기계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기판 중앙에 있던 핵심 칩셋과 대형 커패시터가 격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펑!
"으윽!"
매캐한 검은 연기가 솟구쳤고, 도윤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넘어졌다.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실험실 안은 순식간에 매캐한 탄내로 가득 찼다.
"하아, 하아, 하아……."
도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오실로스코프 화면은 이미 빛을 잃고 꺼져 있었고, 기판의 핵심 부품들은 시커뎠게 타들어가 흔적도 없이 뭉개져 있었다. 스피커 역시 숨이 끊어진 듯 완전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귓가에는 방금 전까지 들렸던,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의 비명과 살인마라는 기괴한 단어가 맴돌았다.
밖에는 여전히 억수 같은 비가 창문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도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과연 자신이 잠을 못 자서 환청을 들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 작은 기계가 닿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깨워버린 것일까.
어둠 속에서 도윤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