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18화: 조력자 혹은 적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풍겨오는 곰팡이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으윽……."
민아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겨우 눈을 떴다. 머리가 무겁고 시야가 흐릿했다. 움직이려 했지만 양손과 양발이 거친 밧줄에 묶인 채 철제 의자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 먼지 쌓인 낡은 선반들과 정체불명의 기계 부품들이 널브러진 것으로 보아, 재개발 구역 어딘가에 방치된 버려진 기계 부품 공장이나 창고 같았다.
"정신이 좀 드나 보군."
어둠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외진 전등 불빛 아래, 도윤이 서 있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 안경을 고쳐 쓰며, 도윤의 자취방 옷장에서 사라졌던 올리브색 맥코트를 입은 사내.
"도윤아……?"
민아는 안도감에 숨을 들이쉬었지만, 이내 온몸의 세포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경고 신호를 보냈다.
눈앞의 남자는 얼굴과 체형, 목소리까지 임도윤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에 서린 지독한 소시오패스 특유의 차가움, 그리고 입꼬리를 뒤틀어 올리며 비웃는 표정은 평소 어수룩하고 따뜻했던 동기 임도윤의 것이 절대 아니었다.
"너…… 누구야? 도윤이는 어디 있어?"
민아의 다급한 질문에 가짜 도윤은 피식 웃으며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도윤의 사라진 구형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누구긴. 나도 임도윤이지."
가짜가 스마트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네가 알던 그 나약한 도윤이와 0.01% 다른 차원에서 살아온 임도윤. 그쪽 세상에서는 꽤 유명한 천재이자, 현상 수배 중인 도망자지."
"다른 차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도윤이 어딨어!"
민아가 소리치며 발버둥을 치자, 의자가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바닥을 긁었다. 가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민아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차갑고 축축한 빗물 냄새와 미세한 피비린내가 났다.
"헛소리가 아니야, 민아 씨. 네 곁에 있던 그 바보 같은 임도윤이 졸업 작품을 만든답시고 뻘짓을 하다가 공간의 틈새를 찢어버렸거든. 그놈이 오실로스코프로 THz 대역의 양자 노이즈를 튜닝할 때 방출된 전파가, 내 차원의 안테나에 수신된 거야."
가짜의 두 눈동자가 기이한 안광을 뿜어냈다.
"난 내 세계에서 경찰들에게 쫓기고 있었어. 횡령과 살인 혐의로 말이지. 막다른 골목에서 잡혀 죽기 직전이었는데, 네 똑똑한 남사친이 건너편에서 구명줄을 던져주더군. 그래서 난 그 주파수를 밟고 역추적 장치를 돌려 이 세계의 창문을 열었어. 그게 바로 네가 랩실에서 봤던 그 이상한 동전과 붉은 볼펜의 진실이야."
가짜의 차분하고 논리적인 설명은 민아의 이성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어제 랩실에서 도윤이 숨기려 했던 '한성은행' 볼펜과 2028년도 100원 동전, 그리고 최근 며칠 동안 도윤이 보였던 이중적인 기괴한 행적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알던 임도윤이 정말로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버렸고, 그 균열을 통해 이 살인마가 건너왔다는 공상 과학 같은 가설이 머릿속에서 강제로 조각을 맞춰나갔다.
"그럼…… 도윤이가 널 여기로 끌어들였다는 거야?"
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지. 그놈이 기계를 켜서 나를 부른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지금도 그놈은 널 구하겠다는 한심한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서, 경찰들의 수사망을 피해 싱크로 장치를 들고 제3공학관 랩실로 오고 있지. 참 눈물겨운 우정이야."
가짜는 민아의 턱을 놔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아의 머릿속은 극도의 혼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임도윤. 3년 동안 매일 같이 밤을 새우며 회로 판을 납땜하고 커피를 나눠 마시던 순수하고 얌전한 동기.
하지만 그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위험한 차원 게이트를 발명했고, 그것을 비밀로 숨겨둔 채 결국 자신을 이런 끔찍한 납치 파국으로 밀어 넣은 원흉이라는 사실. 도윤은 자신을 구하러 오는 구원자(조력자)인가, 아니면 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자 재앙을 끌어들인 적(敵)인가?
"너희 둘 다…… 미쳤어."
민아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그 장치든 너든, 전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야. 도윤이가 널 잡으러 올 거야. 널 반드시 그 지옥 같은 원래 차원으로 처넣어 버릴 거라고!"
"처넣는다라."
가짜 도윤은 낡은 창고 구석의 거울을 바라보며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은 날 쏠 배짱도 없는 겁쟁이야. 결국 내일 아침이 되면, 이 세상의 임도윤은 죽고 내가 진짜 임도윤이 되어 네 곁에 설 거다. 그때는 내가 아주 다정한 친구가 되어줄 테니 기대하라고."
가짜는 창고 문을 열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철제 문이 요란하게 닫히고 자물쇠가 걸리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민아는 밧줄을 묶은 손목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가죽이 쓸려 피가 흘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도윤이 아군이든 적이든, 혹은 이 재앙의 시발점이든 상관없었다. 이 살인마 괴물이 진짜 임도윤의 얼굴을 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만은 목숨을 걸고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