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너머의 침입자

15화: 잃어버린 타임라인
극도의 정신적 긴장 속에서 밤새도록 인두기를 잡고 회로를 개조한 탓이었을까.
도윤은 아침 7시경, 밀려드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린 채 그대로 필름이 끊기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땜납 찌꺼기와 가위가 들려 있었고, 붉게 타오르며 폭주하던 싱크로 장치는 불길한 맥박처럼 웅웅거리며 방 안의 공기를 계속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가 잠든 짧은 두 시간 동안, 밖에서는 임도윤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끔찍한 타임라인이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어…… 앗!"
도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든 것은 오전 9시 35분이었다.
약속된 거래 시간인 10시까지 불과 2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 엎드려 잔 탓에 얼굴이 붉게 짓눌려 있었고, 굳은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렸다. 다급하게 책상 위의 메인 스마트폰을 쥔 도윤은 숨을 들이켰다.
액정 화면에는 재난 문자처럼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붉은 배지로 떠 있었다.
[ 부재중 전화 42건 ]
- 과 동기 민우 (15건)
- 지도 박용태 교수 (3건)
- 엄마 (8건)
- [알 수 없는 번호] (16건)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도윤은 가장 먼저 민우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 임도윤, 너 지금 어딨어? 미쳤냐?! 오늘 아침 8시 반에 대학로에서 지나가던 사람 벽돌로 내리치고 달아난 놈 너 맞지? 경찰들이 지금 학교랑 네 자취방으로 출동했어! CCTV에 네 맥코트랑 얼굴 너무 선명하게 찍혔단 말이야! ]
"벽돌……?"
도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가짜의 만행이었다. 가짜 도윤은 오늘 아침 일찍, 도윤의 자취방에서 훔쳐 간 올리브색 맥코트를 입고 길거리에서 끔찍한 묻지마 상해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도 도윤의 얼굴을 하고, 대낮의 CCTV 카메라가 가장 잘 잡히는 곳을 노려서.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온 다급한 문자들도 가득했다.
[ 도윤아, 갑자기 대기업 인턴 보증금이라고 3천만 원이 급하다고 해서 아빠 신용대출까지 급하게 땡겨서 보냈다. 연락 좀 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빠 지금 병실에서 걱정하느라 혈압이 잔뜩 올라가셨어. ]
"아…… 안 돼."
도윤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가짜는 도윤의 구형 스마트폰에서 털어낸 가족 정보를 이용해 보이스피싱까지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받으며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아들의 취직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의 빚을 져가며 거액을 송금했을 터였다.
돈의 액수보다, 부모님의 신뢰와 헌신을 이용해 가정이 짓밟혔다는 사실이 도윤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위우우우웅-! 위우우우웅-!
그 순간, 멀리서 길게 찢어지는 사이렌 소리가 자취방 골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한 대가 아니었다. 최소 서너 대의 경찰차가 원룸 건물 밑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투박한 소리들과 형사들의 굵고 강압적인 목소리들이 건물 1층 로비를 가득 채웠다.
- 302호 임도윤이다! 도주로 차단하고 현관문 따고 들어가!
- 총기 및 흉기 소지 가능성 있다! 방검구 확실히 착용해!
도윤은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건물 밑 골목길에는 경광등을 요란하게 번쩍이는 순찰차 석 대가 골목 입구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었고, 방검 조끼를 입은 형사들이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복도를 타고 진동했다.
쿵, 쿵, 쿵!
시간선은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가짜는 도윤을 경찰의 추격을 받는 흉악범이자 사기꾼으로 완벽하게 위장하여, 도윤이 거래 장소인 랩실로 가는 길목을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 이대로 방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면, 도윤은 평생 살인마의 누명을 쓴 채 감옥에서 썩어야 했고, 가짜는 무방비 상태인 강민아를 살해하고 도윤의 신분과 가족들의 돈을 가지고 여유롭게 도망치게 될 것이 뻔했다.
'민아를 구하러 가야 해. 그 새끼를 내 손으로 잡아야 돼.'
도윤은 붉게 타오르며 폭주하는 싱크로 장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자취방 가구들을 딛고 창틀 위로 올라섰다.
3층 높이.
하지만 다행히도 창문 바로 아래에는 건물 외벽의 낡은 철제 가스 배관과 2층 에어컨 실외기 앵글이 위태롭게 붙어 있었다.
쿵, 쿵, 쿵!
"경찰이다! 임도윤, 당장 문 열어! 문 강제 개방한다!"
쇠 지렛대로 문틀을 뜯어내는 요란한 마찰음이 등 뒤에서 비명처럼 울렸다.
도윤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창틀을 디디며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바스락, 퍼억!
가스 배관을 잡고 미끄러지듯 실외기 앵글 위로 착지하는 순간, 날카로운 철제 모서리가 그의 팔뚝과 허벅지를 깊게 찢었다. 뜨거운 피가 티셔츠 위로 배어 나왔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도윤은 담벼락을 넘어 건물 뒤편 좁은 하수구 골목길로 굴러떨어지듯 도망쳤다.
현관문이 부서지며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고함소리가 3층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도윤은 찢어진 옷을 부여잡고, 붉은 흙이 묻은 채 피를 흘리는 몰골로 대학 랩실이 있는 제3공학관을 향해 질주했다. 먹구름이 걷히지 않은 하늘 아래, 진짜 도윤은 이미 세상 모든 이들에게 쫓기는 도망자가 되어 결전의 무대로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