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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2화

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

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

2화: 색깔별로 모아야 사는 목숨

다이아몬드 하나를 닦았을 뿐인데 동굴 한쪽이 갑자기 낮처럼 밝아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바닥만 한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먼지를 걷어 낸 다이아몬드는 내 얼굴을 비출 정도로 반짝였다.

문제는 그 주변이었다.

빛나는 다이아몬드 옆에는 포도알만 한 루비들이 진흙처럼 엉겨 있었다. 그 위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은 숟가락과 양 뼈가 얹혀 있었다. 사파이어 더미 사이에는 금화가 끼어 있었고 진주 목걸이는 녹슨 투구 뿔에 걸려 반쯤 끊어져 있었다.

"와."

감탄이 아니었다.

한숨이었다.

"이건 청소보다 분리수거가 먼저네요."

[분리수거?]

카엘루스가 내 머리 위에서 코웃음을 쳤다. 숨결만으로 머리카락이 뒤집혔다.

[짐의 보물에 네 하찮은 인간 기준을 들이대겠다는 뜻이냐.]

"보물이라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보물이 아니라 보물 모양 산사태예요."

[산사태?]

"네. 왕관 밑에 금화가 깔렸고 금화 밑에서 보석이 긁히고 있어요. 보석 밑에는 정체불명의 뼈가 썩고 있고요. 이건 가치가 아니라 사고입니다."

카엘루스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는 재빨리 손에 든 천을 들어 보였다.

"만지기 전에 물어볼게요. 이쪽 보석들 정리해도 됩니까?"

[감히 허락을 요구하는 것이냐.]

"무단으로 만졌다가 죽을 것 같아서요."

[제법 정확한 판단이군.]

칭찬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장 바깥쪽 잔해부터 골라내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 조각, 금화에 눌려 납작해진 은 촛대, 먼지에 엉긴 거미줄, 그리고 또 뼈.

"드래곤님."

[왜 부르지.]

"혹시 양을 드시고 뼈를 아무 데나 버리시는 편인가요?"

[먹는 순간 관심이 끝나는 것뿐이다.]

"그게 아무 데나 버리는 거예요."

카엘루스의 꼬리가 바닥을 탁 쳤다. 보석 더미가 와르르 흔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려 방금 분류한 루비들을 막았다.

"잠깐! 흔들면 섞이잖아요!"

[네가 짐에게 소리를 질렀느냐?]

"아니요. 루비한테 말한 겁니다."

[보석에게 말을 거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살려면 뭐든 합니다."

나는 루비들을 한곳에 모았다. 작은 것은 앞쪽으로, 큰 것은 뒤쪽으로, 금이 간 것은 따로 뺐다. 붉은빛이 깊은 것과 연한 것도 대충 구분했다.

처음에는 카엘루스가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오는 숨소리가 묘하게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드래곤이 턱을 보물 더미 위에 얹고 있었다. 눈동자는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왜요?"

[계속해라.]

"마음에 드셨어요?"

[아직은 돌멩이 장난에 불과하다.]

그 말과 다르게 카엘루스의 동공은 살짝 커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잡았다. 이 드래곤은 단순한 결벽증이 아니었다. 정리된 물건이 눈에 주는 쾌감에 약했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터졌다.

내가 푸른 보석을 옮기려고 사파이어 하나를 집어 든 순간 손목 주변의 공기가 번쩍였다. 금빛 원이 생겨나더니 팔을 꽉 조였다.

"악!"

[멈춰라.]

카엘루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손에 든 사파이어는 바늘처럼 차가워졌다.

"저 안 훔쳤어요. 같은 색끼리 모으려던 것뿐이에요."

[레어의 방어 마법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 보물을 이동시키는 자를 도둑으로 판단하지.]

"그럼 허락해 주세요!"

[짐이 인간에게 보물 관리를 허락한다고 선언하라는 말이냐.]

"살아 있는 청소 도구가 팔 잘리기 직전인데 체면이 중요하세요?"

금빛 원이 더 조여 왔다. 손끝이 저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계약하셨잖아요. 일주일. 마음에 안 들면 그때 죽인다고요. 지금 죽이면 드래곤님이 한 말을 드래곤님이 어기는 건데요."

카엘루스의 눈가가 꿈틀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짐의 맹세를 들먹여?]

"저도 들먹이고 싶지 않았는데 팔이 너무 아파서요."

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카엘루스가 앞발을 들어 금빛 원 위에 발톱 끝을 얹었다.

[레어여. 이 벌레를 칠 일 동안 보물 관리의 말단으로 인정하라. 단 하나라도 숨기면 즉시 가루로 만들어도 좋다.]

금빛 원이 탁 풀렸다.

나는 사파이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손목에는 가는 금색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말단이라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줄은 아는군.]

"살려주신 건 감사하죠. 가루로 만든다는 부가 조건은 덜 감사하고요."

카엘루스가 콧김을 뿜었다. 이상하게도 조금 웃은 것처럼 들렸다.

방어 마법이 사라진 뒤 작업은 빨라졌다. 나는 보석을 색깔별로 나누고 크기 순서로 줄을 세웠다. 붉은 보석 구역은 루비와 가넷을 구분하려다 세 번이나 틀렸다. 푸른 보석은 사파이어와 아쿠아마린을 따로 뒀고 투명한 보석은 반사되는 빛의 색을 기준으로 나누었다.

[틀렸다.]

카엘루스가 불쑥 말했다.

"또요?"

[그 붉은 것은 루비가 아니라 화염 가넷이다. 루비보다 빛이 짧고 심장이 얕다.]

"보석에 심장이 있어요?"

[아름다운 것에는 중심이 있다.]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이상하게 그럴듯했다. 카엘루스는 앞발 끝으로 가넷 하나를 밀었다. 그가 건드린 보석은 루비 더미와 떨어져 따로 빛났다.

"그럼 드래곤님이 보석 구분 담당하세요. 저는 배열 담당 할게요."

[짐에게 노동을 시키겠다는 뜻이냐.]

"협업이라고 해요."

[인간은 건방진 단어를 많이 아는군.]

그러면서도 카엘루스는 가넷을 하나 더 밀어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일했다. 정확히는 나는 뛰어다니며 정리했고 카엘루스는 누워서 발톱 끝으로 보석을 톡톡 밀었다. 그래도 거대한 드래곤의 발톱 한번은 내 두 손보다 빨랐다.

붉은 보석들이 계단처럼 놓이자 동굴 벽에 노을빛이 번졌다. 푸른 보석들을 맞은편에 모으자 차가운 물결 같은 빛이 바닥을 훑었다. 투명한 보석은 중앙에 두었다. 다이아몬드와 수정과 이름 모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서로에게 길을 열었다.

동굴이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보물들이 그저 많았다. 지금은 어디를 봐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빛이 흐르고 색이 이어졌다. 금화의 노란 광택도 더 이상 먼지 속에 묻히지 않았다.

카엘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별로예요?"

[조용히 해라.]

"네."

[빛이 움직인다.]

그는 눈을 반쯤 감았다. 금색 비늘 위로 붉은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흘렀다. 거대한 몸의 긴장이 아주 조금 풀리는 게 보였다.

[이 각도는 나쁘지 않군.]

"각도요?"

[짐이 잠들 때 동굴 북쪽 천장에 반사되는 빛이 거슬렸다. 그래서 늘 보물을 뒤섞어 빛을 죽였는데 네가 정리하니 오히려 흐름이 순해졌다.]

"그럼 지금까지 잠자리 불편해서 예민하셨던 거예요?"

[짐은 언제나 완벽하다.]

"네. 완벽하게 예민하셨군요."

카엘루스가 눈을 떴다.

나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다이아몬드를 닦는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드래곤도 잠자리 조명이 안 맞으면 성질이 나빠지는구나. 역시 생명체는 다 비슷했다.

그때 중앙 보석 더미 아래에서 검은 모서리가 드러났다.

처음에는 썩은 나무 상자인 줄 알았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였고 표면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나는 천으로 감싸 그것을 잡아당겼다.

[손대지 마라!]

카엘루스의 외침이 동굴을 찢었다.

나는 놀라 뒤로 넘어졌다. 검은 상자는 반쯤 나온 채 바닥에 걸렸다.

"왜요? 위험한 거예요?"

카엘루스가 순식간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방금 전의 나른함이 사라져 있었다.

[봉인된 공물함이다.]

"공물함이면 보물 아닌가요?"

[보물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지. 오래전 어리석은 인간 왕이 짐에게 바친 것이다. 함부로 열면 주변 생명체의 욕망을 비틀어 먹는다.]

"왜 그런 걸 보석 더미 밑에 두셨어요?"

[잊고 있었다.]

"잊으면 더 위험하잖아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검은 상자를 보았다. 방금 내 손이 닿았던 부분에서 희미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기분 탓이길 바랐지만 이 세계에서는 기분 탓이 제일 위험했다.

"표시해야겠어요."

[무엇을?]

"위험 물품 표시요. 만지지 말 것. 열지 말 것. 드래곤도 잊지 말 것."

[마지막 문장은 지워라.]

"그럼 '주인 허락 없이 접근 금지'로 할게요."

카엘루스는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막지는 않았다. 나는 붉은 보석을 담던 낡은 천 조각을 찢어 검은 상자 주변에 묶었다. 그리고 금화 몇 개를 세워 작은 울타리처럼 만들었다.

"자. 이제 적어도 제가 청소하다가 죽을 확률은 줄었네요."

[네 죽음은 짐의 결정에 달렸다.]

"그 결정이 자꾸 보석 더미 밑에서 튀어나오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카엘루스는 대답 대신 검은 상자를 발톱으로 밀어 더 깊은 그림자 속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

"네."

[네 이름이 뭐지.]

나는 천을 쥔 손을 멈췄다.

처음으로 물었다.

벌레도 먼지도 청소 도구도 아니고 이름을.

"에블린입니다."

[에블린.]

카엘루스가 내 이름을 느리게 굴렸다. 이상하게 동굴의 금화들이 그 소리를 따라 작게 울리는 것 같았다.

[오늘 네가 한 일은 아주 조금 쓸모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감사합니다."

[착각하지 마라. 네 목숨값은 아직 보석 한 줌에도 못 미친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은 보석 두 줌 값 정도로 올려 보려고요."

카엘루스의 눈가가 또 꿈틀했다. 화난 건지 웃은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꾸르르르르.

동굴 전체가 낮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너지는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카엘루스가 미묘하게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깨달았다.

배에서 난 소리였다.

세계관 최강 골드 드래곤의 배에서.

"혹시 배고프세요?"

[아니다.]

꾸르르르르르.

이번에는 더 길었다.

카엘루스의 꼬리가 보석 더미를 덮었다. 감추려는 것 같았지만 배 소리는 동굴보다 컸다.

나는 생존 본능으로 계산했다.

청소로 하루를 벌었다. 정리로 조금 더 벌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먹을 것이었다.

"드래곤님."

[말하지 마라.]

"저 요리도 조금 합니다."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나를 향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살기 위해서라면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드래곤 밥상도 차린다.

문제는 이 레어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죽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나는 검은 공물함에 묶어 둔 붉은 천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일단 오늘 저 상자는 절대 열지 않는다.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든 스테이크 비슷한 걸 만든다.

그래야 내 목숨값이 보석 두 줌에서 고기 한 접시 값으로라도 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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