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

3화: 드래곤 밥상 차리기
카엘루스의 배가 또 울렸다.
이번에는 보물방 천장의 수정들이 가늘게 떨릴 만큼 컸다. 막 정리해 둔 루비들이 바닥에서 딸랑거렸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꼬리로 제 배를 슬쩍 가리려는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다.
"드래곤님."
[말하지 마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네 얼굴이 이미 떠들고 있다.]
"그럼 얼굴로만 제안할게요. 밥 드실래요?"
카엘루스의 금빛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짐은 인간의 먹이를 탐하지 않는다.]
"저도 인간 먹이로 드리겠다는 게 아니에요. 드래곤님이 드실 수 있는 재료를 찾아서 만들겠다는 거죠."
[네가 짐의 식량을 만지겠다고?]
"굶은 드래곤 옆에서 자는 건 제 생존 계획에 없거든요."
카엘루스가 고개를 낮췄다. 큰 이빨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렀다.
[식량 구역에는 손대면 안 되는 것이 많다.]
"그러니까 안내가 필요합니다. 독 있는 거 먹고 죽으면 드래곤님도 손해잖아요."
[네 죽음은 짐에게 손해가 아니다.]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하는 임시 관리자가 사라지면 손해죠."
나는 손목의 가는 금색 자국을 들어 보였다. 이 자국이 남았다는 건 적어도 오늘 당장 가루가 되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칠 일짜리 계약 안에 있어요. 배고프다고 관리자를 구워 드시면 계약 위반입니다."
카엘루스의 콧김이 내 앞머리를 흔들었다.
[짐이 네 고기를 탐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요. 배고픈 분은 평소보다 예민해질 수 있으니까요."
[짐은 언제나 완벽하다.]
"네. 완벽하게 배고프신 것 같고요."
잠시 뒤 카엘루스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금빛 비늘이 보물 위를 스치자 동굴이 노을처럼 물들었다.
[따라와라. 허락 없이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면 태워 버린다.]
"안내 감사합니다. 협박은 접수했고요."
보물방 뒤편에는 평범한 벽처럼 보이던 금빛 바위가 있었다. 카엘루스가 발톱으로 바위를 두 번 두드리자 벽이 조용히 갈라졌다.
안쪽에서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낯선 향이 쏟아졌다.
선반마다 유리병과 돌 상자가 빽빽했다. 얼음 속에 묻힌 고기 덩어리도 있었고 별빛을 머금은 과일도 있었다. 어떤 버섯은 자기 몸에서 파란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물방의 난장판을 생각하면 여기도 재난 현장일 줄 알았다. 의외로 재료는 종류별로 나뉘어 있었다.
문제는 이름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걸 다 드세요?"
[짐은 먹을 때 가장 좋은 것만 먹는다.]
"그럼 나머지는요?"
[잊는다.]
역시 정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나는 가까운 선반부터 살폈다. 얼음에 묻힌 붉은 고기는 색이 선명했고 냄새도 심하지 않았다. 옆의 검은 고기는 표면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났다.
"이건 뭐예요?"
[그림자 멧돼지다. 인간에게는 독이다.]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네 그림자가 먼저 배부르게 된다. 그 뒤에는 네 몸을 먹겠지.]
나는 조용히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럼 이 붉은 고기는요?"
[달빛 사슴이다.]
"드래곤님도 인간도 먹어도 돼요?"
[인간은 아마도.]
"아마도요?"
[짐은 인간의 위장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 연구를 안 하셨으면 확신 있는 재료를 골라 주세요."
카엘루스가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앞발톱으로 얼음 속 다른 고기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산양이다. 인간도 먹는다. 예전에 인간 왕이 사냥해서 바쳤으니까.]
"그건 확실하네요. 그걸로 할게요."
나는 허락을 기다렸다가 손을 뻗었다. 손목의 금색 자국이 따끔거리자 공기 중에 작은 원이 떠올랐다.
[관리자 에블린. 주인 허락 아래 식량 하나를 이동한다.]
카엘루스의 낮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금빛 원은 내 손목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조이지 않았다.
"말단도 식량 하나쯤 옮길 수 있네요."
[착각하지 마라. 짐이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네. 그래서 계속 물어보고 있잖아요."
나는 산양 고기를 낡은 은 쟁반에 올렸다. 다음으로 소금처럼 보이는 하얀 결정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조금 찍어 혀에 대려는 순간 카엘루스가 발톱으로 내 손목을 막았다.
[그것은 번개 소금이다. 인간 혀에 닿으면 사흘 동안 혀가 저릴 것이다.]
"소금에 왜 번개가 들어가요?"
[맛있으니까.]
"드래곤님 기준의 맛있음은 이제 믿지 않을래요."
나는 말없이 손을 뺐다. 대신 누런 결정이 든 작은 병을 꺼냈다.
[그것은 바위 소금이다.]
"이건 먹어도 돼요?"
[그건 그냥 짜다.]
"드디어 평범한 재료가 나왔네요."
선반 끝에는 뿌리가 달린 푸른 버섯이 있었다. 갓 아래에서 푸른 불꽃이 흔들리는 모양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금색 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손가락 끝과 버섯 사이에 얇은 금빛 막이 생겼다. 막에 닿은 푸른 불꽃이 파직 소리를 내며 튀었다.
"악!"
나는 손을 뒤로 뺐다. 카엘루스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별불 버섯이다. 네가 만졌다면 손끝부터 수정이 되었겠지.]
"그걸 왜 식량 구역에 놔둬요?"
[짐에게는 식량이니까.]
"그럼 인간 금지라고 표시해 두셔야죠."
[짐이 왜 네 기준에 맞춰 표식을 붙여야 하지?]
"제가 드래곤님 밥을 하려면 필요하니까요. 지금도 이 표식이 아니었으면 손가락이 수정이 될 뻔했잖아요."
카엘루스의 시선이 내 손목으로 옮겨 갔다. 잠깐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 표식은 너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레어의 식량을 보호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는 살아났고요."
카엘루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버섯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향이 진한 풀 하나를 골랐다. 카엘루스는 그걸 보고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향초는 고기 냄새를 죽인다.]
"향초요?"
[인간 왕들이 고기에 뿌리던 잡초다. 씹을 때마다 풀밭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아주 조금만 쓸게요. 고기 냄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릴 정도로요."
[고기 맛을 망치면 네 몫은 없다.]
"원래 제 몫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요."
식량 구역 가장 안쪽에는 검은 석판이 놓여 있었다. 돌 위에는 깊은 홈이 파여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작은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화로예요?"
[짐의 불꽃으로만 달아오른다.]
"그럼 불 좀 빌릴게요. 아주 약하게요."
[짐에게 약한 불을 요구하다니.]
"고기를 재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카엘루스가 콧김을 뿜었다. 석판 한가운데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잠깐! 너무 세요!"
나는 재빨리 쟁반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석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증발하며 하얀 김을 뿜었다.
[약하게 했다.]
"그건 드래곤 기준이잖아요. 제 손이 안 익을 정도로요."
[인간은 지나치게 연약하군.]
"그래서 요리할 땐 인간 기준으로 해야 맛있습니다."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숨을 길게 뱉었다. 석판의 붉은빛이 한 단계 낮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까이 댔다. 뜨겁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였다.
"좋아요. 지금입니다. 이 온도 유지해 주세요."
[짐이 네 말대로 불꽃을 조절해야 하나?]
"맛있는 고기를 위한 요청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카엘루스가 석판을 바라봤다. 붉은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내 요구에 맞춰 불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나는 고기 가장자리의 지방을 잘라 석판 위에 올렸다. 지방이 녹아 투명하게 퍼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위에 산양 고기를 올리자 지글지글한 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카엘루스의 고개가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지금은 만지면 안 돼요."
[짐은 만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숨결이 너무 가까워요. 불이 세지면 안 됩니다."
[짐의 숨결은 불꽃이 아니다.]
"그래도 고기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카엘루스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그 뒤로 화로 쪽으로 흐르던 뜨거운 공기가 슬그머니 물러났다.
나는 고기를 뒤집고 바위 소금을 부쉈다. 향초는 손톱만큼만 뜯어 기름에 넣었다. 풀 향이 살짝 올라오더니 고기 냄새와 섞였다.
"이제 잠깐 기다리면 돼요."
[왜 기다려야 하지?]
"겉만 태우고 속이 차가우면 맛이 없으니까요."
[짐은 뜨거운 것을 먹는다.]
"드래곤님은 뜨거운 돌도 드실 수 있겠죠. 그래도 이건 제 방식으로 해 볼게요."
카엘루스는 한참 고기를 노려봤다. 배가 다시 낮게 울리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으며 고기 옆면을 눌렀다. 탄력이 돌아오자 석판에서 내렸다.
은 쟁반에 고기를 올리는 순간 향이 퍼졌다. 기름과 소금과 고기 냄새가 차가운 동굴 공기를 밀어냈다.
카엘루스가 인간 모습으로 변한 건 그때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렀다. 검은 옷을 걸친 카엘루스는 방금 전까지 동굴을 채우던 드래곤보다 더 가까이서 위협적이었다.
그는 내 맞은편 돌의자에 앉았다.
"포크는요?"
[그런 가느다란 물건이 왜 필요하지?]
"손으로 드실 거예요?"
[짐의 손은 더럽지 않다.]
"그럼 접시는 왜 썼는데요."
카엘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한입 베어 문 순간 동굴이 조용해졌다.
나는 침을 삼켰다.
"어때요?"
[...]
"맛없어요?"
[조용히 해라.]
그가 다시 한입을 먹었다. 이번에는 더 큰 조각이었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접시로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 불만으로 팽팽하던 어깨도 천천히 풀렸다.
[고기가 죽지 않았다.]
"고기는 원래 죽어 있어요."
[맛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드래곤이 칭찬을 할 때는 꼭 이상하게 한다.
카엘루스는 남은 고기를 천천히 먹었다. 급하게 삼키는 대신 한 조각씩 오래 씹었다. 향초를 넣은 부분에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접시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이 풀은 다음부터 절반만 넣어라.]
"맛없다는 뜻이에요?"
[고기 맛을 가리지 않는 선에서만 향이 난다. 그 정도가 좋다.]
"그럼 다음에는 절반만 넣을게요."
말이 먼저 나간 뒤에야 깨달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식사를 약속하고 있었다.
카엘루스도 그것을 알아챈 듯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금빛 눈동자 속에 있던 날카로움이 아주 잠깐 누그러졌다.
[인간 왕국의 요리사들은 고기에 향신료를 산처럼 쌓았다. 씹을 때마다 무슨 짐승을 먹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아마 고기 상태가 나빠서 그랬을걸요."
[네 고기는 깨끗했다.]
"제가 손질했으니까요."
카엘루스는 접시의 남은 기름까지 손가락으로 찍어 맛봤다. 그러고는 내 손목의 금색 자국을 바라봤다.
[내일부터 식량 구역 앞에 네 이름을 남겨 두겠다.]
"관리자 명단이 승진하는 건가요?"
[허락 없이 들어가면 가루가 된다는 경고문이다.]
"그건 승진이 아니라 출입 규칙이잖아요."
[짐이 네게 규칙을 따로 주는 일은 드물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말은 여전히 협박인데 이상하게 조금 덜 무서웠다.
"좋아요. 그럼 내일은 식량부터 정리할게요.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부터 표시해야 해요. 고기마다 상태도 확인하고요."
[짐의 식량에 표식을 붙이겠다고?]
"드래곤님이 잊어버리면 제가 죽을 수 있으니까요."
카엘루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내일도 이 고기를 만들어라.]
"재료가 있으면요."
[있게 만들겠다.]
나는 잠깐 멈췄다.
세계관 최강 드래곤이 내일 먹을 고기를 확보하겠다고 했다. 그 말은 칠 일짜리 계약보다 든든했다.
문제는 식량 구역 가장 깊은 선반 아래에서 희미하게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기 냄새를 맡고 있던 카엘루스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알고도 외면하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른 척 빈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오늘은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내일은 저 안개가 묻은 재료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