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

시놉시스
세계관 최강의 미친 골드 드래곤, 카엘루스의 레어 한복판으로 빙의했다! 눈을 뜨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한 에블린은 전생의 자취 짬바를 발휘해 지저분한 레어를 청소하고 드래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목숨을 부지한다. 처음엔 하찮은 벌레 취급하던 드래곤이 점차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는 유쾌하고 달달한 인외 로맨스 판타지.
1화: 보석보다 빛나는 것은 먼지입니다
"……이게 다 뭐야?"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등 아래에서 느껴지는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숨을 들이켰다.
"헉!"
눈앞에 펼쳐진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았고, 사방의 벽은 거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바닥이었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평범한 침대가 아니었다.
금화.
반짝이는 보석.
화려한 왕관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대의 유물들.
말 그대로 '보물 산' 위에 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이게 대체……."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려던 찰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마지막 기억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길. 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번쩍이는 번개. 그리고 그다음은 암전이었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번개 맞고 이세계 빙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보물 더미 위냐고. 딱딱해서 허리 나갈 것 같네."
나는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동굴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강타했다.
[—하찮은 생명체가 감히 짐의 침소에 발을 들였구나.]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금색 비늘이 샹들리에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생명체를.
산더미 같은 보물들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보던 드래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오만하다는 '골드 드래곤'.
"드, 드래곤……."
[그래. 짐을 알아보다니, 죽기 전의 예우치고는 나쁘지 않군.]
드래곤—아니,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어졌다. 파충류 특유의 서늘하고 압도적인 안광이 나를 훑었다. 그가 앞발을 한 번 까딱이자, 엄청난 풍압이 몰려와 나를 뒤로 넘어뜨렸다.
"잠깐만요! 살려주세요!"
[살려달라? 짐의 레어는 신성한 곳이다. 너 같은 벌레가 기어 들어와 먼지를 묻힌 것만으로도 멸문지화에 해당하는 죄지.]
먼지?
나는 그 단어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직업병—아니, 자취 짬바가 발휘된 것이다. 나는 카엘루스의 거대한 앞발과 내 주변의 보물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레어는 엉망진창이었다.
금화들 사이에는 끈적이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보석들은 먼지가 뽀얗게 앉아 본래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드래곤의 화려한 비늘 사이사이에도 죽은 곤충의 껍데기나 마른 풀잎 같은 것들이 끼어 있었다.
이건 드래곤의 레어가 아니라, 그냥 거대한 쓰레기통이었다.
"……저기, 위대한 드래곤님."
[말을 허락한 적 없다. 마지막으로 유언이나 남겨라.]
카엘루스의 입가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브레스가 터져 나올 기세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이게 청소예요? 이게 드래곤의 침소냐고요!"
[……뭐?]
열기가 멈췄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주변을 가리켰다.
"보세요! 이 아름다운 에메랄드는 먼지 때문에 유리알보다 못하게 변했고, 저 금화들은 거미줄 때문에 떡이 됐잖아요! 심지어 당신 비늘! 그 아름다운 골드 비늘 사이에 저건 뭐죠? 설마 저번 달에 먹다 남은 양의 뼈인가요?"
[짐의 비늘에…… 양의 뼈라니! 그럴 리가—!]
카엘루스는 당황한 듯 자신의 옆구리를 살폈다. 그리고 정말로 비늘 틈새에 끼어 있던 마른 뼈다귀를 발견하고는 거대한 몸을 휘청였다.
"제가 이걸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저는 청소의 요정—은 아니고, 아무튼 청소 전문가거든요! 저를 죽이면 이 레어는 영원히 쓰레기장으로 남을 거예요. 하지만 저를 살려주신다면, 일주일 안에 이곳을 태양보다 더 반짝이게 만들어 드릴게요!"
[……네가?]
카엘루스의 눈에 의구심이 서렸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짐의 마법으로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일을, 고작 인간인 네가 하겠다고?]
"마법은 편리하지만 섬세함이 부족하죠. 구석구석 쌓인 묵은때는 사람 손이 가야 하는 법입니다. 위대한 드래곤님, 당신의 품격에 맞는 레어를 원하지 않으세요?"
정적이 흘렀다. 카엘루스는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좋다. 일주일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땐 너를 아주 천천히 녹여서 금화의 장식품으로 만들어 주지.]
"네! 맡겨만 주세요!"
살았다. 일단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지만 곧바로 막막함이 몰려왔다. 이 넓은 동굴을, 이 산더미 같은 보물들을 혼자서 청소해야 한다니.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근처에 굴러다니던 낡은 비단 천(아마도 어느 나라의 국기였을 법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 발밑에 있던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닦기 시작했다.
슥슥, 슥슥.
먼지를 걷어내자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이것 보세요. 조금만 닦아도 이렇게 예쁜데."
[흥. 그래 봤자 돌덩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엘루스는 내 근처에서 떠나지 않고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 드래곤은 결벽증이 있는 게 분명하다. 다만 방법을 몰랐거나 너무 게을렀을 뿐.
나는 보물 더미를 뒤져 쓸만한 도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최고급 와인(세정제 대용), 마법이 깃든 빗자루(이건 진짜 쓸만했다), 그리고 누군가 공물로 바친 듯한 향기로운 기름들.
본격적인 '드래곤 레어 대청소'의 시작이었다.
"자, 드래곤님. 우선 저쪽으로 좀 비켜주시겠어요? 거기 금화 밑에 쥐구멍이 있는 것 같아서요."
[짐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명령이 아니라 협조죠. 깨끗한 침대를 원하시잖아요?"
[……쳇.]
카엘루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거대한 몸을 일으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빗자루를 휘둘렀다.
지옥 같은 자취방 생활 5년. 방치된 원룸을 신축 아파트로 탈바꿈시키던 나의 능력이, 드디어 이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다려라, 카엘루스. 내가 너를 청소 없이는 못 사는 드래곤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에블린의 눈에 불타는 의지가 서렸다.
그녀의 이세계 생존기, 아니 '이세계 미화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