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6화: 검은 우산의 경고
박소라는 생각보다 빨리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더니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검은 우산 아래의 소년은 얼굴이 비어 있었다. 소라는 연필을 쥔 손을 떨며 말했다.
"얼굴을 그리려고 하면 자꾸 까맣게 뭉개져. 종이에 먹물을 쏟은 것처럼."
"백도겸."
서진이 이름을 말하자 미술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소라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수는 침착하게 스케치북을 살폈다.
"이 그림, 어제 그린 거야?"
"아니. 오늘 아침에 가방 열었더니 있었어."
"그럼 네 기록도 남는 거네."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서워. 내가 그린 게 아닌 그림도 섞여 있어."
그녀가 넘긴 다음 장에는 해온고 시계탑이 그려져 있었다. 탑 아래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었고, 그중 세 개가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안쪽에는 서진, 이수, 소라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네 번째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다음 기억자."
이수가 말했다.
서진은 네 번째 문 앞에 그려진 물건을 보았다. 낡은 농구공.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민재."
"네 친구?"
"응. 어제 정오 이후에 민재 그림자가 제일 먼저 움직였어. 그게 그냥 우연은 아닐지도 몰라."
소라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그럼 알려줘야지."
"문제는 믿게 만드는 거야."
민재를 믿게 만드는 건 예상보다 쉬웠다. 서진이 "오늘 점심 메뉴는 카레인데 네 감자튀김에 머리카락이 나올 거다"라고 하자, 민재는 처음엔 웃었다. 하지만 급식판 위 감자튀김 사이에서 실제로 긴 머리카락이 나오자 얼굴이 굳었다.
"너 몰카 찍냐?"
"아니."
"그럼 예언자냐?"
"그쪽이 차라리 낫겠다."
서진은 민재를 체육관 뒤 창고로 데려갔다. 이수와 소라도 함께였다. 네 사람은 오래된 매트와 농구공 사이에 둘러앉았다. 서진은 최대한 간단히 설명했다. 반복되는 아침, 정지된 정오, 시계탑, 백도겸, 다섯 명의 기억자.
민재는 중간에 세 번 웃으려 했다. 하지만 이수의 표정과 소라의 그림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도 오늘 정오 지나면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아마."
"아마라니."
"우리도 처음이라 매뉴얼 없어."
민재는 잠시 천장을 보다가 말했다.
"좋아. 퀘스트 받았다고 치자."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게임 아니야."
"알아. 그래서 더 무섭지."
민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 서진은 그제야 민재가 손을 꽉 쥐고 있다는 걸 봤다.
12시 17분.
종소리가 울렸다. 빗방울이 멈췄다. 학생들이 굳었다. 민재는 급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나 움직인다."
그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떨렸다.
그때 체육관 천장에서 검은 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바닥에 닿은 물은 길쭉한 손가락처럼 번지더니 네 사람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소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가!"
서진은 발을 빼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의 어둠이 발목을 감았다. 그 순간 체육관 문이 열리고 검은 우산이 굴러 들어왔다.
백도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찾지 말라고 했잖아."
"도와줄 거면 빨리 도와!"
민재가 소리쳤다.
도겸은 무표정하게 우산을 펼쳤다. 체육관 안에 비가 내렸다. 검은 물이 아니라 투명한 빗물이었다. 빗물이 바닥의 어둠을 씻어내자 네 사람은 동시에 풀려났다.
서진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넌 대체 뭐야?"
도겸은 서진을 지나쳐 시계탑 쪽을 보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실패작."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다섯 번째를 찾으면, 너희 중 하나는 이름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