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9화: 이름을 적는 날
다음 날 아침, 서진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핸드폰 화면은 오전 7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숨을 멈췄다.
창밖으로는 비가 오지 않았다.
햇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책상 위 참고서 모서리에는 말라붙은 라면 국물 자국이 그대로 있었고, 방 안 공기는 어제와 전혀 달랐다.
알람은 계속 울렸다.
되감긴 게 아니었다.
그냥 아침이었다.
서진은 한참 침대에 앉아 있다가 웃었다. 웃음은 곧 울음처럼 변했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부엌에는 엄마가 있었다.
그녀는 편의점 삼각김밥 대신 프라이팬에 계란을 굽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라 서진은 문 앞에서 멈췄다.
엄마가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
"엄마가 아침밥 해서."
"못할 것도 아니잖아."
"일 안 가?"
"오후 출근으로 바꿨어."
엄마는 계란을 접시에 올렸다. 조금 탔다.
"오늘 학교에 같이 가려고."
서진은 의자에 앉았다.
"왜?"
"기록 남겨야 한다며. 보호자도 있어야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서진은 그 손을 보다가 말했다.
"엄마."
"응."
"외할머니 이름, 내가 안 잊을게."
엄마는 접시를 내려놓고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네 삼촌 이름 안 잊을게."
두 사람은 탄 계란을 먹었다. 맛은 평범했고, 조금 짰다. 서진은 그 평범함이 좋아서 천천히 씹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금일 전교생 상담 및 안전 점검으로 정상 수업 일부 조정
담임과 교장, 몇몇 교사들은 어제 운동장 사건을 자연재해나 집단 착각으로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전부 믿어서가 아니었다.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록이 남았기 때문이다.
방송 서버에는 12시 17분부터 12시 32분까지의 음성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전교생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 사이사이 낯선 이름들.
1974년 사망자 명단과 1999년 실종 학생들의 이름.
그리고 작은 종 옆 표지판에는 밤새 누군가가 글자를 새겨 넣은 것처럼 문장이 남아 있었다.
해온고 정오 기록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한 종
혼자 남기지 않기 위한 약속
교장은 처음엔 표지판을 치우라고 했다. 하지만 행정실 직원이 "누가 설치했는지 모르겠는데 철거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손이 안 간다"고 말했고, 결국 임시 보존하기로 했다.
이수는 학생회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1974년 사고는 지역 신문 마이크로필름에 남아 있어. 사망자 숫자만 있고 이름은 대부분 누락됐어. 우리가 들은 이름들과 대조해야 해."
지후는 방송 서버에서 파일을 백업하고 있었다.
"1999년 문하린 선배 관련 기록은 생활기록부에 사고 처리로 남아 있었어. 강유현 선배와 오도겸 선배 기록도 일부 복구됐고."
소라는 스케치북 그림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내 그림도 같이 보관할게. 증거라기보다... 증언으로."
민재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왜 여기서 행정 업무를 하고 있지."
이수가 서류철을 밀어줬다.
"네가 어제 책임도 담당한다고 했잖아."
"그건 멋있을 때 한 말이지, 서류 분류할 때 적용되는 말이 아니야."
"적용돼."
서진은 웃으며 종이 상자를 들었다. 그 안에는 유현의 학생증, 해린의 명찰 조각, 낡은 테이프 라벨, 김하은의 이름이 적힌 복사본, 1974년 명단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간호사 보호자로 불려왔지만, 곧 1974년 생존자이자 윤재하의 가족으로 기록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회실 문이 열렸다.
최도윤이 서 있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서진을 보았다.
"야."
민재가 벌떡 일어났다.
"말투 조심."
최도윤은 민재를 흘겨보다가 다시 서진을 봤다.
"미안하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최도윤의 얼굴은 빨갰다.
"샤프심 던진 거. 그리고 그동안..."
그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서진은 그를 보았다. 루프가 있었다면 이 사과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루프 속에서는 몇 번이고 상황을 피해 갔지만 최도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오지 않았다.
"알았어."
최도윤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끝이야?"
"아니. 또 그러면 그땐 진짜 화낼 거야."
민재가 덧붙였다.
"나는 이미 화나 있음."
최도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게."
그는 문밖으로 나가려다 멈췄다.
"어제 운동장에서... 내가 네 이름 불렀지?"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이 완전하진 않은데, 기분 이상하더라."
"어떤데?"
최도윤은 잠깐 생각했다.
"사람이 물건이 아닌 것 같았어."
그 말은 투박했지만, 서진은 이상하게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최도윤이 나간 뒤 민재가 말했다.
"저 정도면 역사적 사건이다."
이수는 서류에 뭔가를 적었다.
"기록할까?"
"하지 마. 걔도 체면이 있지."
소라가 웃었다.
오후가 되자 작은 종 앞에서 임시 추모식이 열렸다.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교장도 말을 길게 하지 못했다. 대신 이수가 대표로 이름들을 읽었다.
한수연.
문하린.
강유현.
오도겸.
서해린.
윤재하.
김하은.
그리고 1974년의 열일곱 이름.
학생들은 조용히 들었다. 모두가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름을 숫자로 넘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진이 작은 종 앞으로 갔다.
그는 종을 울리지 않았다.
대신 손을 얹었다.
종은 차갑지 않았다.
심장 안에서 울리던 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서진은 그 침묵을 오래 느꼈다.
침묵은 공포가 아니었다.
드디어 자기 심장 소리만 들리는 고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