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8화: 비가 그친 학교
비가 그친 뒤의 학교는 낯설었다.
운동장 흙은 젖어 있었고, 창문에는 물방울이 남아 있었다. 급식실에서는 식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교무실 스피커에서는 5교시 시작을 알리는 평범한 종이 울렸다.
서진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시계탑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꼭대기의 종은 사라졌다. 대신 운동장 중앙, 소라가 그린 원이 있던 자리에 작은 종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깨진 자국은 남아 있었지만 검은 물은 흐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우리 왜 운동장에 있지?"
"5교시 시작했잖아."
"방금 누가 내 이름 불렀는데..."
완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기 이름을 부르던 감각, 옆 사람 이름을 붙잡던 이상한 따뜻함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다.
민재가 운동장에 주저앉았다.
"나 진짜 배고파."
이수가 옆에 앉았다.
"나도."
"전교 1등도 배고픈 거 인정하냐?"
"생리현상이야."
소라가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났는지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지후는 수신기를 확인했다. 장비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화면도, 스피커도 켜지지 않았다.
"끝났나 봐."
그 말에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끝났다는 말은 조심스러웠다. 너무 오래 끝나지 않는 하루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꺼냈다.
오후 12시 32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12시 17분이 아니었다. 7시 42분도 아니었다. 되감기지 않았다.
엄마가 다가왔다.
"서진아."
"응."
"집에 가자고 하고 싶은데, 그 전에 선생님한테 설명해야겠지?"
서진은 운동장 한쪽을 보았다. 담임이 멍한 얼굴로 학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교장과 교감도 나와 있었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수가 일어났다.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어도, 기록은 남겨야 해."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 로그는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서버에 자동 저장되니까."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운동장 중앙의 종과 이름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도 있어."
민재는 땅바닥에 누울 듯하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증언자. 단, 밥 먹고."
운동장 중앙의 작은 종 옆에 도겸과 해린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희미하게 볼 수 있는 듯했다.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멈춰서 고개를 갸웃했다.
"저 선배들 누구야?"
도겸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오랜만에 사람 취급 받네."
해린은 작은 종을 바라봤다.
"우리도 이제 갈 수 있을 것 같아."
서진이 다가갔다.
"어디로요?"
해린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아주 옅은 햇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몰라. 근데 더 이상 문턱은 아닌 곳."
도겸은 강유현의 학생증을 서진에게 건넸다.
"이건 학교에 남겨줘. 유현 선배 이름도 같이."
서진은 학생증을 받았다.
"선배 이름도요."
"당연하지."
도겸은 잠시 민재를 보았다.
"친구 잘 붙잡아라."
민재가 바로 말했다.
"제가 붙잡는 쪽이긴 한데, 알겠습니다."
도겸은 웃었다.
해린은 소라에게 다가가 스케치북을 보았다.
"나 예쁘게 그려졌어?"
소라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됐어."
해린의 몸이 빛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겸도 함께 흐려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나란히 서서 운동장을 바라봤다.
"문하린."
서진이 이름을 불렀다.
공기 중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강유현."
이번에는 아주 낮은 남자 목소리.
"들었다."
"오도겸. 서해린."
도겸과 해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이름이 작은 종 표지판에 새겨졌다.
두 사람은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운동장에 바람이 불었다.
서진은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이 뜨거워졌다.
엄마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울어도 돼."
"안 울어."
민재가 옆에서 말했다.
"이미 우는 중인데."
"조용히 해."
"알겠어."
잠시 뒤, 담임이 다가왔다.
"윤서진."
서진은 몸을 굳혔다.
담임은 평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눈빛이 조금 달랐다.
"너희가 뭔가 알고 있지?"
이수가 앞으로 나섰다.
"네. 설명드릴 게 있습니다."
담임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보건실부터 가. 다들 얼굴이 말이 아니다."
민재가 작게 환호했다.
"보건실 가면 침대 있죠."
"한민재, 너는 특히 교무실 와."
"왜 저만요?"
"네가 운동장 방송 마이크를 망가뜨린 것 같다는 제보가 있다."
지후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제가..."
민재가 그의 말을 막았다.
"제가 했습니다."
지후가 놀라 쳐다봤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했다.
"분위기 담당은 책임도 담당함."
이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웃고 있었다.
서진은 시계탑을 올려다봤다.
분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2시 33분.
그리고 34분.
시간은 앞으로 갔다.
처음으로 그 당연한 일이 기적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