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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50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50화: 정오가 지나간 자리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해온고 운동장에는 작은 울타리가 생겼다.

울타리 안에는 깨진 종과 표지판이 있었다. 처음엔 학생들이 이상한 조형물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곳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학교는 공식적으로 해온고 정오 기록 보존회라는 이상한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처음 제안한 건 이수였다.

"동아리 형식이 제일 안정적이야. 학교 기록물 접근 권한도 받을 수 있고, 후배들에게 인계도 가능해."

민재는 동아리 신청서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 너무 딱딱해. 좀 멋있게 가자. 정오 수비대?"

"탈락."

"시간 지킴이?"

"탈락."

"점심 방송반 외전?"

"조용히 해."

결국 이름은 이수의 안으로 통과됐다. 민재는 끝까지 불만이었지만, 동아리 첫 회의 때 간식을 가장 많이 먹었다.

소라는 기록집 표지를 그렸다.

시계탑, 운동장 중앙의 종, 그리고 이름들이 이어진 붉은 선. 그림 속에는 누구도 혼자 서 있지 않았다.

지후는 방송실 장비를 정비했다. 망가진 수신기는 버리지 않고 동아리 보관함에 넣었다. 화면은 켜지지 않았지만, 가끔 조용한 방송실에서 그것을 들여다보면 희미한 잡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름을 잊지 마세요.

그게 실제 소리인지 기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학교에 왔다. 보호자 자격이 아니라 1974년 생존자 증언자로. 처음엔 말할 때마다 손이 떨렸지만, 점점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엄마 이름은 한수연입니다."

그녀는 매번 그렇게 시작했다.

서진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조금씩 과거에서 돌아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윤재하의 이름도 가족 제사상에 올라갔다. 엄마는 오래된 친척들에게 연락했고, 처음엔 모두 불편해했다. 잊고 살던 이름을 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속 윤재하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분식집 앞에서 오토바이에 기대 선 서른두 살의 남자. 서진은 그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워두었다.

"많이 컸네."

가끔 그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서진은 대답했다.

"계속 크는 중이에요."

루프가 끝난 뒤에도 삶은 갑자기 완벽해지지 않았다.

성적표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담임의 상담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최도윤은 사과 이후에도 한동안 어색하게 굴었고, 민재는 점심시간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을 계획표로 만들다 멈칫했고, 소라는 그림이 안 그려지는 날이면 불안해했다. 지후는 방송 잡음이 들리면 잠깐 굳었다.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시계가 12시 17분을 가리키면 숨이 멎었다. 알람이 7시 42분에 울릴 때마다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비 오는 날 횡단보도 앞에서는 발이 굳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멈춘 자리에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윤서진."

"한민재."

"한이수."

"박소라."

"오지후."

별것 아닌 확인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며 부르고, 단톡방에서 장난처럼 부르고, 동아리 회의 출석 체크를 하며 불렀다.

이름은 주문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한 가장 평범한 방법이었다.

가을 축제 날, 보존회는 작은 전시를 열었다.

제목은 정오가 지나간 자리.

1974년 사고 기사 복사본, 1999년 방송 기록, 2016년 신고 기록, 소라의 그림, 지후가 복구한 음성 파형, 이수가 정리한 연표가 전시됐다. 민재는 안내 담당을 맡았다가 중간에 방문객에게 떡볶이 맛집을 설명하고 있어서 이수에게 혼났다.

"전시 설명을 하라고 했지 분식집 영업을 하라고 한 게 아니야."

"역사적 맥락이야. 한빛분식 중요하잖아."

"맞긴 한데 지금은 아니야."

서진은 그 대화를 들으며 웃었다.

전시장 한쪽에는 작은 청취 공간이 있었다. 헤드폰을 쓰면 복구된 방송 일부를 들을 수 있었다.

문하린의 목소리.

이름은 출석부에 있는 글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 문장 앞에서 오래 멈췄다.

축제가 끝날 무렵, 서진은 운동장 중앙의 종 앞에 섰다.

해가 지고 있었다. 시계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지만 더 이상 사람을 삼키지 않았다.

엄마가 옆으로 다가왔다.

"집에 갈까?"

"조금만 있다가."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섰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은 작은 종을 보았다. 그 안에는 더 이상 검은 물도, 붉은 실도 없었다. 깨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끌어들이지 않는 상처.

"엄마."

"응."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는 또 나 살려달라고 할 거야?"

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의 엄마라면 "당연하지"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는 오래 생각했다.

"응."

그녀가 말했다.

"나는 또 살려달라고 할 거야. 대신 이번엔 그 말이 누군가를 혼자 남기지 않게 끝까지 볼 거야."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바람이 불었다.

작은 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서진은 많은 이름을 떠올렸다.

한수연. 문하린. 강유현. 오도겸. 서해린. 윤재하. 김하은. 윤미정. 한민재. 한이수. 박소라. 오지후.

그리고 윤서진.

자기 이름을 떠올리는 일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았다.

운동장 저편에서 민재가 소리쳤다.

"야, 윤서진! 떡볶이 먹으러 안 가?"

이수가 바로 말했다.

"축제 뒤처리 먼저."

"먹고 하면 더 잘 돼."

"그 말 지난번에도 했어."

소라가 웃고, 지후가 방송실 열쇠를 흔들었다.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갔다 올게."

엄마는 웃었다.

"늦지 마."

"응."

그는 친구들에게 뛰어갔다.

시계탑은 오후 5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오는 오래전에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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