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4화: 오늘의 문
남은 문은 두 개였다.
오늘 12:17
그리고 복도 끝의 글자 없는 문.
오늘의 문 앞에서 모두가 말이 없어졌다. 1974년은 오래된 재난이었고, 1999년은 선배들의 시간이었고, 2016년은 서진의 빚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들이 직접 바꿔 온 하루였다.
민재가 문을 노려봤다.
"여기 들어가면 우리가 구한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거지?"
이수가 대답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해야 해. 되감긴 시간의 보호가 풀릴 때 어떤 사건이 복구되는지."
"복구라는 말 되게 싫다."
"나도."
소라의 스케치북에는 오늘의 해온고가 그려져 있었다. 교실, 급식실, 방송실, 옥상, 상담실. 곳곳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우리가 개입한 곳들이야."
지후가 수신기를 확인했다.
"방송은 계속되고 있어. 이름을 부르는 흐름도 유지돼. 하지만 오늘 문 안에서는 각자 자기 사건을 붙잡아야 할 것 같아."
엄마는 뒤에 남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가자."
문을 열자 익숙한 교실 소리가 밀려왔다.
해온고 2학년 3반. 점심시간 직전. 아이들은 아직 루프를 모른다. 담임은 성적표를 들고 있었고, 최도윤은 뒤에서 샤프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민재는 서진에게 장난을 걸려고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서진 일행은 교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시계는 12시 16분 40초를 가리켰다.
이수가 말했다.
"오늘의 원본이야."
12시 16분 50초.
스피커에서 잡음이 났다.
치직.
12시 16분 55초.
창밖 시계탑 아래에 검은 우산을 든 도겸이 서 있었다.
12시 17분.
종이 울렸다.
뎅.
교실이 멈췄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진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다섯 명 모두 움직일 수 있었다. 대신 각자의 발밑에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정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바뀐 사건을 원상 복구합니다.
교실 문이 열렸다.
첫 번째로 옥상 장면이 나타났다. 루프 초반, 떨어질 뻔했던 1학년 학생이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서진이 몇 번의 반복 끝에 붙잡아 살린 아이였다.
그 아이의 손이 미끄러졌다.
소라가 비명을 삼켰다.
"안 돼."
서진이 달려가려 했지만 교실 바닥이 그를 붙잡았다. 정오는 속삭였다.
당신이 개입하지 않은 원본으로 돌아갑니다.
민재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뛰었다.
"개입 다시 하면 되잖아!"
그는 옥상 장면으로 몸을 던졌다. 손이 통과할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잡혔다. 민재는 1학년 학생의 손목을 붙잡고 난간 위로 끌어올렸다.
"너 이름 뭐야!"
아이는 울면서 대답했다.
"서... 서민규."
민재가 소리쳤다.
"서민규! 너 떨어지는 거 아냐!"
방송이 그 이름을 잡았다.
서민규.
옥상 장면이 빛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장면은 미술실이었다. 소라의 그림이 검게 번지고, 그녀의 이름이 지워지던 순간. 이번에는 소라가 직접 걸어갔다.
과거의 소라는 스케치북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현재의 소라는 그녀 앞에 앉았다.
"박소라."
"근데 그림이 나를 삼켜."
"그림은 네가 보는 걸 남기는 거야. 너를 지우는 게 아니야."
현재의 소라는 과거의 스케치북 위에 자신의 스케치북을 겹쳤다.
"내 이름은 박소라. 그리고 나는 내가 본 사람들을 그릴 거야. 사라지게 하려고가 아니라, 돌아오게 하려고."
미술실 벽에 그려졌던 검은 그림들이 색을 되찾았다.
박소라.
방송이 이름을 불렀다.
세 번째 장면은 방송실이었다. 지후가 잡음에 갇히던 순간. 스피커들이 그의 목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현재의 지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헤드폰을 씌우지 않고, 스피커를 켰다.
"혼자 듣지 마."
과거의 지후가 울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면?"
"같이 들으면 확인할 수 있어."
지후는 마이크를 켰다.
"오지후."
방송실 전체가 대답했다.
오지후.
네 번째 장면은 교실 앞이었다. 이수가 반장으로서 모두를 지키려고 거짓말을 선택했던 순간. 그녀는 혼자 책임지겠다고 말하려 하고 있었다.
현재의 이수는 과거의 자신 앞에 섰다.
"그 말 하지 마."
과거의 이수가 물었다.
"그럼 누가 책임져?"
"같이."
"그건 불확실해."
"그래서 무서운 거야. 그런데 확실한 희생은 답이 아니야."
과거의 이수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한이수.
방송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장면은 서진의 자리였다.
루프 첫날의 서진. 그는 혼자 창밖을 보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학생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현재의 서진은 과거의 자신 앞에 섰다.
과거의 서진은 그를 보지 못했다.
정오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무도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 있었다. 내가 움직여서, 내가 알아차려서, 내가 구하려고 해서 모두가 다쳤다는 생각.
엄마가 그의 옆에 섰다.
"아니."
그녀가 말했다.
"네가 움직였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봤어."
민재가 뒤에서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너 안 움직였어도 우리 인생 이미 꼬여 있었음."
이수가 덧붙였다.
"정오가 원인이야. 네가 원인이 아니야."
소라와 지후도 가까이 섰다.
서진은 과거의 자신에게 말했다.
"일어나."
과거의 서진은 창밖을 보았다.
"무서워도 일어나. 혼자가 아니게 될 거야."
과거의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송이 이름을 불렀다.
윤서진.
교실 전체가 빛으로 흔들렸다.
오늘의 문 안에서 구했던 사건들이 하나씩 고정됐다. 되감긴 시간이 풀려도, 그들이 함께 다시 붙잡은 선택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계가 12시 17분을 지나갔다.
12시 18분.
오늘의 문이 열렸다.
복도로 돌아오자 네 번째 문도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글자 없는 마지막 문뿐이었다.
그 문 위에 천천히 글자가 나타났다.
정오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