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1화: 되감기 없는 복도
하루 밖의 복도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런데도 바람이 불었다. 1974년의 흙먼지, 1999년 방송부실의 뜨거운 기계 냄새, 병원 소독약 냄새, 오늘 점심시간 급식실의 카레 냄새가 한꺼번에 섞여 지나갔다.
서진은 숨을 들이마시다 기침했다.
"여기... 시간이 섞였어."
이수가 복도 양쪽 문을 살폈다.
"섞인 게 아니라 나열된 것 같아. 정오가 붙잡은 순간들이 문으로 정리돼 있어."
문마다 시간이 적혀 있었다.
1974.06.14 12:17
1999.06.14 12:17
2016.06.14 12:17
오늘 12:17
가장 끝의 문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민재가 뒤를 돌아봤다.
"우리가 들어온 문은?"
없었다.
방금 뛰어들어온 흰 문은 사라지고, 복도 끝에는 어둠만 있었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페이지 위에는 복도가 그려져 있었지만, 선이 계속 흔들렸다.
"여기선 그림이 고정이 안 돼. 내가 그리면 바로 다른 시간으로 바뀌어."
지후의 수신기도 잡음만 냈다. 방송 주파수를 맞추려 해도 숫자가 계속 흘러내렸다.
"밖에 방송은 아직 이어져 있어. 그런데 여기선 수신만 되고 송신이 약해."
엄마는 서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잡은 힘은 강했다.
"문을 하나씩 열어야 하는 거지?"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각 시간대에 남은 이름을 밖으로 보내야 마지막 문이 열릴 거야."
정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 지금까지 정오는 늘 말이 많았다. 조건을 들이밀고,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의 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하루 밖의 복도에서는 조용했다.
민재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조용한 거 진짜 싫다. 시험 감독 선생님이 뒤에 서 있는 기분이야."
서진은 첫 번째 문 앞에 섰다.
1974.06.14 12:17
손잡이는 녹슨 종처럼 차가웠다.
"여기부터 가자."
문을 열자 흙먼지가 밀려왔다.
그들은 동시에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해온고는 없었다. 대신 낮은 언덕과 철거 현장이 있었다. 낡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 있었고, 비닐 천막이 바람에 찢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정오인데 어두웠다.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정오에 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주민 여러분은 즉시 퇴거하십시오.
그 소리는 이미 늦은 경고였다. 언덕 아래에는 포클레인이 움직이고 있었고, 집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휘청였다.
"여기..."
어린 윤미정이 보였다.
다섯 살쯤 된 아이. 먼지투성이 얼굴로 무너진 담벼락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한수연이 있었다. 젊은 외할머니. 그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재를 팔로 막고 있었다.
서진은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수가 붙잡았다.
"조심해.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이름을 꺼내는 거야."
"그래도..."
그 순간 건물이 무너졌다.
굉음이 온몸을 때렸다. 서진은 반사적으로 엄마를 감쌌다. 먼지 속에서 한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정아, 눈 감아."
어린 윤미정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엄마도 같이 가."
"엄마는 종 울리고 갈게."
한수연은 아이를 잔해 틈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무너진 당집 쪽으로 기어갔다. 지붕 아래 녹슨 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종줄을 잡는 순간, 시간은 멈췄다.
정오였다.
한수연은 피투성이 손으로 종을 울렸다.
뎅.
죽어가던 아이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잔해에 깔린 누군가가 눈을 떴다. 하지만 종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한수연의 그림자는 얇아졌다.
서진은 깨달았다.
한수연은 단순히 아이들을 살린 게 아니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1초를 계속 만들어냈다. 무너지는 순간과 죽는 순간 사이에 아주 얇은 틈을 만들고, 아이들을 그 틈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보았다.
"명단이 다시 흐려져."
1974년 사망자 명단이 페이지 위에서 흔들렸다. 복구했던 이름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려 했다.
지후가 수신기를 들어 올렸다.
"밖으로 방송해야 해. 여기 이름들을 현재의 방송에 실어야 해."
"송신 약하다며?"
"그래도 해야지."
민재가 주변을 둘러봤다.
"마이크가 어디 있는데?"
엄마가 당집의 종을 보았다.
"저거."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어린 자신과 한수연이 있는 곳으로.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엄마."
서진이 불렀다.
윤미정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들을게."
한수연은 종줄을 잡은 채 현재의 딸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과거의 한수연은 놀라지 않았다. 아주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웃었다.
"미정아."
엄마는 울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무너졌다.
"왜 나만 보냈어."
"살라고."
"엄마 이름도 잊게 만들고?"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한수연은 무너지는 마을을 보았다.
"사람들이 잊은 거야. 사고를 덮으려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죽은 사람들을 숫자로 바꾸려고."
그녀는 종줄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이제 네가 다시 불러."
엄마는 종줄을 잡았다.
손목의 붉은 실이 종에 감겼다. 지후가 수신기를 종 가까이 가져갔다. 소라가 스케치북에 명단을 다시 적기 시작했고, 이수는 이름이 흐려지는 순서를 읽어냈다.
민재는 먼지 속에서 무너지는 목재를 몸으로 막았다. 실제로 막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자리만큼은 먼지가 덜 밀려왔다.
서진은 엄마 옆에 섰다.
엄마가 말했다.
"한수연."
종이 울렸다.
뎅.
지후의 수신기가 살아났다.
한수연. 고명주. 이태섭. 박경아...
이름들이 방송을 타고 복도 밖, 현재의 학교로 흘러갔다. 잔해 속의 아이들이 하나씩 눈을 감았다.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이름이 불렸을 때, 한수연의 몸에서 검은 먼지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엄마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손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손이 닿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잘 살았니?"
엄마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어."
한수연이 웃었다.
"그럼 됐다. 계속 살았다는 뜻이니까."
철거 현장이 빛으로 무너졌다.
문이 다시 나타났다.
복도로 돌아가기 직전, 서진은 어린 엄마가 잔해 밖으로 밀려나는 장면을 보았다. 어린 윤미정은 울면서 한수연을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 한수연!"
그 목소리가 5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 현재까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