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0화: 하루 밖의 문
하루 밖의 문은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학교 전체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방송실의 스피커가 떨렸고, 시계탑의 종이 갈라졌고, 1974년의 명단이 돌아왔다. 그런데 흰 문 앞에 서자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남은 것은 문 너머에서 들리는 윤재하의 목소리뿐이었다.
"아직 한 사람 이름이 남았어."
서진은 문에 손을 얹었다.
"누구요?"
문은 차가웠다. 얼음처럼 차가운 게 아니라, 오래 만지지 않은 병원 복도 벽처럼 차가웠다.
윤재하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정오가 처음으로 살린 아이."
이수가 숨을 들이켰다.
"1974년 붕괴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
문 너머에서 대답 대신 종소리가 났다.
뎅.
소라의 스케치북이 펼쳐졌다. 1974년 명단 옆에 작은 빈칸이 하나 더 나타났다. 사망자 명단이 아니었다.
생존자 1명
이름 칸은 검게 지워져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니야."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엄마, 알아?"
윤미정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뜻에 가까웠다.
"나는 그 얘기 들은 적 없어. 엄마가 돌아가셨고, 나는 친척집에서 컸고..."
말이 끊겼다.
그녀의 손목 붉은 실이 갑자기 밝아졌다. 실 안에서 오래된 장면이 흘렀다. 어린 윤미정. 다섯 살쯤 된 아이.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서 울고 있었다. 한수연은 그 아이를 감싸 안고 종을 울렸다.
서진은 숨을 멈췄다.
"엄마가..."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첫 번째로 살아남은 아이였어."
엄마는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나는 기억 안 나."
정오의 목소리가 흰 문 주변에서 울렸다.
생존자 이름 미등록.
민재가 낮게 말했다.
"미등록이면 어떻게 되는데?"
지후의 수신기가 잡음을 토해냈다.
첫 생존자가 등록되지 않으면 정오는 종료될 수 없습니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움켜쥐었다.
"그럼 어머님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미등록 생존자는 정오의 시작점이야. 이름을 등록하면..."
엄마가 대신 말했다.
"내가 정오와 연결돼."
서진은 즉시 말했다.
"안 돼."
엄마는 그를 보았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 앞에서는 눈물도 늦게 오는 듯했다.
"네가 할 말 아니야."
"엄마."
"나는 네가 그 말 할 때마다 무서워. 안 된다고, 내가 할 거라고, 엄마는 빠지라고. 그 말이 결국 너 혼자 남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민재가 작게 기침했다.
"어머님 말씀이 맞긴 해."
서진이 그를 노려봤지만 민재는 피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배운 게 그거잖아. 누가 빠지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거."
이수는 스케치북의 빈칸을 보며 말했다.
"등록은 희생이 아닐 수도 있어. 숨겨진 이름을 제자리로 돌리는 절차라면, 어머님이 자기 이름을 말해야 해."
엄마는 흰 문 앞에 섰다.
그녀의 손목 실이 문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이번에는 엄마도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이 얽혔다.
윤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정아."
엄마의 입술이 떨렸다.
"오빠."
"누나가 널 살렸고, 너는 서진이를 살렸어. 그게 죄가 되게 두지 마."
엄마는 눈을 감았다.
"나는 평생 도망친 줄 알았어. 엄마도, 오빠도, 그 동네도 다 잊고 살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서진은 처음 듣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호사 윤미정도, 늘 바쁜 엄마도 아닌,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목소리.
"근데 잊은 게 아니었어. 잊게 된 거였어."
그녀는 문을 향해 말했다.
"내 이름은 윤미정."
흰 문이 떨렸다.
"한수연의 딸 윤미정."
검은 빈칸에 글자가 새겨졌다.
윤미정
순간 엄마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서진이 붙잡았고, 민재와 이수가 서진을 붙잡았다. 소라가 바닥에 선을 그어 발밑을 고정했고, 지후가 마이크를 켰다.
"전교 방송 연결한다!"
그의 목소리가 학교 전체로 퍼졌다.
"윤미정!"
학생들이 따라 불렀다. 영문도 모르는 교사들, 복도에 선 아이들, 이름을 되찾은 오래된 그림자들까지.
윤미정.
윤미정.
윤미정.
이름이 많아질수록 엄마를 끌어당기던 힘이 약해졌다. 엄마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붙잡고 서 있었다.
정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첫 생존자 등록.
문 위 글자가 바뀌었다.
하루 밖의 문 개방 가능.
하지만 곧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통과자는 되감긴 시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서진은 문 너머를 보았다. 하얀 빛 속에서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루프 속에서 구했던 순간들. 샤프심을 맞기 전 피했던 일, 옥상에서 떨어질 뻔한 학생을 붙잡았던 일, 소라의 이름을 되찾았던 일, 지후가 방송실에 갇히지 않게 한 일.
정오가 끝나면 그 모든 일이 어떻게 될까.
이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되감긴 시간을 포기한다는 건, 루프에서 바꾼 사건들이 원래 결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우리가 구한 애들이..."
소라가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페이지 위의 이름들이 흔들렸다. 일부는 선명했고, 일부는 다시 흐려졌다.
지후가 말했다.
"방송으로 붙잡아야 해. 문을 열고 지나가는 동안, 현실 쪽 이름들이 지워지지 않게."
엄마가 서진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같이 결정하자."
서진은 모두를 보았다. 민재, 이수, 소라, 지후, 엄마. 멀리 계단 아래에서 도겸과 해린, 강유석의 희미한 실도 느껴졌다. 윤재하와 문하린, 한수연의 이름도 종 안쪽에서 빛났다.
누구를 두고 갈 것인가.
정오의 질문은 아직 문틈에 남아 있었다.
서진은 마이크 앞으로 갔다.
"우리는 누구도 두고 가지 않을 거야."
정오가 바로 반응했다.
응답 확인.
이수가 다급히 말했다.
"서진아!"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끝 아니야."
그는 문을 향해 물었다.
"대신 네가 두고 간 이름을 전부 데려갈 거야. 1974년, 1999년, 오늘. 네가 지운 모든 이름을."
흰 문이 크게 열렸다.
문 너머는 바깥이 아니었다. 끝없는 복도였다. 복도 양쪽에는 닫힌 문들이 줄지어 있었고, 문마다 시간이 적혀 있었다.
1974.06.14 12:17
1999.06.14 12:17
2016.06.14 12:17
오늘 12:17
그리고 가장 끝에 아무 글자도 없는 문이 있었다.
문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가야 진짜 밖이야.
윤재하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라. 하루 밖에서는 정오가 더 이상 시간을 되감아 주지 않는다.
서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1초가 끝났다.
12시 17분.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모두가 함께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