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39화: 12시 16분 59초
방송은 학교 전체로 퍼졌다.
처음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5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의 교실들, 급식실, 교무실, 보건실. 사람들은 물속에 잠긴 듯 느리게 움직였고, 눈동자는 흐렸다.
그러나 이름이 들리자 조금씩 달라졌다.
창가에서 졸던 학생이 자기 명찰을 내려다봤다.
교무실에서 서류를 넘기던 교사가 펜을 멈췄다.
복도에서 물걸레를 밀던 주무관이 자신의 이름표를 만졌다.
이 방송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말해 주세요. 혼자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옆 사람 이름을 같이 불러 주세요.
지후의 목소리가 반복됐다.
그리고 첫 번째 대답이 나왔다.
"김나연."
1학년 교실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자기 이름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입은 움직였다.
옆자리 학생이 그녀를 보았다.
"김나연."
그리고 자기 이름을 말했다.
"정우빈."
이름은 느린 물결처럼 퍼졌다. 교실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운동장으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람들의 움직임이 정상 속도에 가까워졌다.
시계탑 내부의 깨진 종이 거칠게 떨렸다.
서진은 종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손목 실은 이제 수많은 이름의 빛과 연결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목소리가 심장으로 들어와 어지러웠지만, 혼자 짊어지는 무게와는 달랐다.
정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질문을 재개합니다.
종의 균열 사이로 검은 빛이 모였다. 그 빛은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얼굴은 없고, 몸은 시곗바늘과 붉은 실로 이루어진 존재. 오래된 신이라기보다, 오래 반복된 규칙이 사람 모양을 흉내 낸 것 같았다.
윤서진. 당신은 누구를 두고 갈 겁니까?
모두가 숨을 멈췄다.
이번에는 서진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문하린의 말을 기억했다.
대답하지 말고, 질문을 바꿔.
서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는 누구의 이름을 잊었지?"
정오의 형체가 멈췄다.
질문 권한이 없습니다.
이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권한을 요구하는 문제는 틀렸어. 이름을 빼앗긴 사람이 있다면 물을 수 있어."
민재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름 부르는 중이거든."
소라의 스케치북이 빛났다. 아직 검게 지워진 이름 칸들이 하나씩 흔들렸다.
지후는 방송 주파수를 더 올렸다.
"1974년 첫 번째 정오 사망자 명단을 연결할게."
엄마가 한수연의 이름을 불렀다.
"한수연."
그 이름이 종 안쪽에서 울리자 검은 형체가 뒤로 밀렸다.
서진은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를 잊었어?"
정오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장부의 페이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1974년 사망자 명단. 검게 지워진 16개의 이름. 한수연만 읽을 수 있었던 명단.
검은 칸들이 떨렸다.
문하린의 방송이 낮게 흘렀다.
정오도 처음엔 누군가의 기도였어. 하지만 이름을 잊은 기도는 규칙이 되고, 규칙은 사람을 먹어.
서진은 이해했다.
정오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철거 현장에서 아이들을 살리고 싶었던 한수연의 절박한 종소리.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고를 덮었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웠다. 이름 없는 기도만 남아 계속 아이들을 살리겠다며 다른 시간을 빼앗았다.
"첫 번째 아이들."
서진이 말했다.
"그 이름을 잊었지."
정오의 형체가 갈라졌다.
기록 없음.
"기록이 없으면 찾아."
기록 없음.
"그럼 기억해."
기억 없음.
서진은 손목의 실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 안 종소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뎅.
시간이 멈췄다.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오후 12시 16분 59초.
모든 것이 정오 직전으로 되감긴 게 아니었다. 12시 17분이 되기 1초 전. 종이 울리기 직전의 세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틈.
이수가 숨을 삼켰다.
"서진아, 네가 시간을 뒤로 밀었어."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많이는 못 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1초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몸 전체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1초 안에서만 검은 칸들이 열렸다.
소라가 스케치북에 빠르게 선을 그었다.
"보여. 이름이 보여."
그녀는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한수연. 고명주. 이태섭. 박경아. 조윤호..."
이름을 읽을 때마다 학교 방송 스피커가 따라 불렀다. 현재의 학생들이 이유도 모른 채 그 이름들을 반복했다.
지후는 울면서도 마이크 볼륨을 유지했다.
"계속해!"
소라는 마지막 이름까지 읽었다.
"남도윤."
열일곱 번째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오의 형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사람의 비명이 아니라 오래된 종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첫 번째 명단 복구.
이수가 말했다.
"세 조건이 다 모였어. 종을 울린 사람의 이름, 종을 멈춘 사람의 죄, 종을 깨울 사람의 질문."
민재가 급하게 물었다.
"그럼 끝난 거야?"
아니었다.
서진은 알고 있었다. 심장 안의 종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12시 16분 59초. 마지막 1초가 손끝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오의 형체가 무너진 자리에서 문이 나타났다.
문은 학교 정문도, 상담실 문도, 시계탑 문도 아니었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흰 문.
문 위에는 글자가 떠올랐다.
하루 밖의 문
문하린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문을 지나면 정오는 끝나. 하지만 끝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엄마가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강유석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루프가 풀리면 되감긴 하루의 보호도 사라진다. 정오가 미뤄둔 상처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상처라니."
이수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죽었어야 했던 사람, 잊혔던 사고, 덮였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현실이 된다는 뜻이야."
서진은 문을 보았다.
마지막 1초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두드렸다.
똑.
똑.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윤재하의 목소리였다.
"아직 한 사람 이름이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