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4화: 멈춘 학교
12시 18분.
시계탑의 분침이 움직였다.
서진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도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세상이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민재는 급식판을 든 채 복도 한복판에 서 있었고, 담임은 교무실 문을 열다 말고 굳어 있었다.
"넘겼어."
이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우리 진짜로 정오를 넘겼어."
서진은 창밖을 보았다. 비는 공중에 박힌 유리 조각처럼 멈춰 있었다. 운동장 중앙의 물웅덩이에는 잔물결 하나 없었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움직여?"
"문이 닫힌 뒤의 세계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둘은 동시에 돌아섰다. 복도 끝, 과학실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교사도 학생도 아닌 옷차림. 낡은 회색 코트, 젖지 않은 머리카락, 손목에 감긴 붉은 실.
"놀랄 거 없다. 아직 너희는 죽지 않았어."
서진이 이수 앞으로 반 발 나섰다.
"누구세요?"
"이 학교에서 오래전 사라진 사람."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름은 강유현. 너희 선배라고 해두자."
이수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검은 우산 든 애랑 한패예요?"
"한패라기보단 피해자 동문회에 가깝지."
강유현은 과학실 문을 열었다. 문 안쪽은 이상했다. 원래 있어야 할 실험대 대신, 어두운 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벽에는 해온고 졸업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고, 그 사진 속 학생들 중 몇몇은 얼굴이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오면 설명해주지."
서진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복도 반대편에서 낮은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시계탑이 아니었다. 학교 전체가 몸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강유현이 말했다.
"정오 이후의 학교는 오래 버틸 곳이 못 돼. 멈춘 애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들이 깨어나거든."
"것들?"
그 순간 민재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서진은 민재를 보았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바닥에 비친 그림자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림자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윤... 서... 진..."
민재의 목소리였지만 민재가 아니었다.
서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수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들어가!"
셋은 과학실 안쪽 복도로 뛰었다. 뒤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바닥을 긁으며 따라왔다. 멈춘 학생들의 발밑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것들이 벽과 천장을 타고 기어왔다.
강유현은 붉은 실을 풀어 문틀에 감았다.
"눈 감아!"
서진은 이수의 손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귀 바로 옆에서 무언가가 이를 갈았다. 축축한 숨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러나 붉은 실이 팽팽하게 울리는 순간, 모든 소리가 끊겼다.
눈을 뜨자 과학실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실험대, 비커, 낡은 암막 커튼. 다만 창문 밖은 여전히 멈춘 비였다.
강유현은 교탁에 걸터앉았다.
"여기부터는 잘 들어. 해온고 시계탑은 그냥 시계가 아니야. 27년 전, 이 학교에서 한 학생이 정오에 죽었고 그 뒤로 매년 누군가가 같은 하루에 묶였다."
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우리도 죽어요?"
"보통은."
이수가 차갑게 말했다.
"위로는 못 하시네요."
"거짓말보다 낫지."
강유현은 서진의 손에 들린 메모지를 보았다.
"그 문장. 누가 줬지?"
"몰라요."
"그럼 아직 희망은 있네."
"그게 왜요?"
강유현은 칠판에 분필로 숫자 세 개를 썼다.
17 / 5 / 1
"루프를 깨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열일곱 번째 종소리, 다섯 명의 기억자, 그리고 첫 번째 죽음의 진실."
멀리서 다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