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36화: 한민재의 선택
시계탑 계단은 올라갈수록 좁아졌다.
처음에는 다섯 명이 나란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씩 줄을 서야 했다. 벽에는 이름들이 빼곡했고, 계단 틈에서는 검은 물이 스며 나왔다. 물은 발목을 잡지 않았지만 지나간 자리마다 작은 시곗바늘을 남겼다.
민재가 맨 뒤에서 중얼거렸다.
"이런 데는 꼭 체육 성적 낮은 사람부터 탈락하던데."
서진이 뒤돌아봤다.
"너 체육 잘하잖아."
"그래서 더 불안하지. 내가 빠지면 너희 평균 기동력이 확 떨어져."
소라가 힘겹게 웃었다.
그때 계단이 흔들렸다. 아래쪽에서 문이 하나 열렸다. 문 안에는 해온고 교실이 보였다. 평범한 1학년 때 교실. 창가 자리, 여름 햇빛, 칠판에 적힌 수행평가 안내.
민재의 발이 멈췄다.
서진은 바로 알아차렸다.
"민재야?"
문 안에서 어린 민재가 웃고 있었다. 지금보다 키가 작고, 목소리가 높았다. 그의 앞에는 서진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서진은 지금의 서진과 달랐다. 더 말수가 적고, 더 자주 고개를 숙이는 아이.
어린 민재가 말했다.
"야, 너 혼자 밥 먹냐?"
어린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같이 먹자. 나도 오늘 친구 없음."
현재의 민재는 입을 다물었다.
이수가 낮게 말했다.
"계단이 각자한테 문을 보여주는 것 같아."
민재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별거 아니야. 첫 만남 리플레이."
문 안 장면이 바뀌었다. 중학교 운동장. 비 오는 날. 서진이 누군가에게 밀려 넘어졌고, 민재가 앞에 섰다.
"야, 윤서진한테 왜 그래?"
상대 아이들이 비웃었다.
"네가 뭔데?"
어린 민재는 잠깐 망설였다가 말했다.
"친군데."
그 말이 문 밖까지 흘러나왔다.
현재의 민재는 눈을 피했다.
"아, 저거 진짜 오글거리네."
정오의 목소리가 계단 벽에서 들렸다.
한민재.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민재의 손목에 검은 실이 감겼다.
윤서진의 곁에 남는 선택.
서진이 달려가려 했지만 계단이 늘어났다. 두 사람 사이 거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민재야!"
민재는 손목을 붙잡았다.
"아프진 않아. 기분은 더럽지만."
문 안 장면은 또 바뀌었다. 현재의 교실. 루프가 시작되기 전, 민재가 아무것도 모르고 웃던 날들. 정오는 그 웃음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 민재가 서진에게 빌려준 우산, 몰래 건넨 빵, 성적표를 보고 같이 욕해주던 점심시간.
당신은 늘 가벼운 척했습니다.
계단 벽의 이름들이 민재를 향해 기울었다.
그래야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민재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닥쳐."
정오는 멈추지 않았다.
윤서진이 사라지면 당신은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서진의 가슴이 조여왔다.
"그만해!"
민재가 먼저 소리쳤다.
"너도 그만해!"
서진은 멈췄다.
민재는 검은 실을 붙잡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너 또 네 얘기인 줄 알지? 내가 너 때문에 있는 줄 알지?"
"민재야..."
"맞아.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어. 네가 혼자 밥 먹는 게 신경 쓰였고, 네가 맞고 있는 게 보기 싫었고, 네 옆에 있으면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았어."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근데 그게 가짜냐? 누가 필요해서 시작한 마음은 전부 가짜야?"
정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문 안의 어린 민재가 현재의 민재를 보았다.
민재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이번 웃음은 억지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웃음이 아니었다.
"나 혼자 웃긴 놈으로 남는 거 안 해."
검은 실이 흔들렸다.
"서진이 옆에 남는 것도 아니고, 서진이를 대신해 남는 것도 아니야."
그는 손목의 실을 끌어당겨 계단 난간에 묶었다.
"나는 내가 고른 친구들이랑 같이 간다."
계단이 울렸다.
문 안의 어린 민재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검은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대신 붉은빛으로 변해 계단 난간을 감았다. 흔들리던 계단이 안정됐다.
이수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묶었어."
지후가 수신기를 확인했다.
"주파수가 안정됐어. 민재가 자기 실을 고정점으로 만든 것 같아."
민재는 어깨를 으쓱했다.
"봤냐. 분위기 담당도 쓸모 있다."
서진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
"뭐가."
"네가 그냥 괜찮은 줄 알았어."
민재는 잠깐 서진을 보다가 손을 빼냈다.
"그건 나중에 떡볶이 사면서 자세히 사과해. 지금은 종 깨러 가야지."
그들은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계단은 이제 전과 달랐다. 민재가 묶은 붉은 실이 난간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 그 길 위에서는 검은 물이 더 이상 올라오지 못했다.
위쪽에서 문하린의 방송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혼자 남겠다는 사람을 믿지 마세요. 그 말은 정오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입니다.
서진은 민재의 등을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민재가 자신을 붙잡아 준 게 아니었다.
민재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있는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