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33화: 이름의 장부
기록실은 지하에 있었지만 먼지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젖은 종이 냄새가 났다. 장마철 책가방 안에서 하루 종일 눌려 있던 프린트물 같은 냄새. 철문을 열자 천장 낮은 방이 나타났고, 사방 벽에는 오래된 서류함이 빼곡했다.
서류함마다 연도가 붙어 있었다.
1974
1975
1988
1999
2016
현재
연도는 순서대로 놓여 있지 않았다. 어떤 서류함은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어떤 서류함은 바닥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장부의 표지에는 검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정오 보관 기록
민재가 장부를 보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저런 건 만지면 꼭 손가락 잘리는 물건 아니냐?"
이수가 장부 주변을 살폈다.
"함정일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유도한 이상 읽어야 해."
엄마는 기록실 입구에서 멈춘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떠오른 붉은 실은 서진의 실과 가끔 같은 박자로 떨렸다.
"나 여기 와본 적 있어."
서진이 놀라 돌아봤다.
"엄마가?"
"아니, 현실에서는 아니야. 꿈에서."
엄마는 1999년 서류함을 바라봤다.
"네가 사고 난 뒤 몇 년 동안 같은 꿈을 꿨어. 지하실에서 누가 장부를 펴고, 내 이름 옆에 도장을 찍는 꿈."
지후가 수신기를 켰다. 기록실 안에서는 잡음이 또렷한 글자처럼 들렸다.
계약자 윤미정. 보증 시간 12년.
서진의 얼굴이 굳었다.
"12년?"
이수가 계산했다.
"초등학교 5학년 사고에서 지금까지 대략 6년이야.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데 왜 회수가 시작됐지?"
소라가 장부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
장부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윤미정의 이름 아래에 다른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윤재하 - 원상환자
윤미정 - 보증자
문하린 - 임시 봉인자
강유현 - 기억 보관자
오도겸 - 문턱 감시자
서해린 - 이름 증언자
그리고 마지막 줄.
윤서진 - 회수 지연 사유
민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이름 옆에 직책 붙여놓은 거 진짜 소름 돋네."
이수는 조용히 마지막 줄을 읽었다.
"회수 지연 사유. 서진이가 대상이 아니라 사유로 적혀 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정오의 목적이 서진이를 데려가는 것만은 아닐 수 있어. 서진이를 핑계로 다른 계약들을 계속 유지한 거야."
서진은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손이 통과하지 않았다. 장부는 살아 있는 피부처럼 따뜻했다.
페이지가 다시 넘어갔다.
1974년 6월 14일. 해온동 재개발 구역.
글자 아래에 흑백 사진이 떠올랐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의 언덕. 낡은 집들, 철거 표시, 비닐 천막. 그 한가운데 작은 당집 같은 건물이 있었다. 지붕에는 녹슨 종이 매달려 있었다.
엄마가 낮게 말했다.
"저기... 우리 엄마가 살던 동네야."
"외할머니?"
서진은 외할머니를 사진으로만 봤다.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엄마는 외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장부의 글자가 이어졌다.
첫 번째 정오. 철거 현장 붕괴. 사망자 17명.
방 안 공기가 차가워졌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꼭 쥐었다.
"17명."
이수는 사진 속 당집의 종을 보았다.
"시계탑 종이 원래 학교 종이 아니었어."
지후의 수신기에서 오래된 라디오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오에 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주민 여러분은 즉시 퇴거하십시오.
다른 목소리. 울부짖는 여자.
아직 사람이 있어요! 아이들이 안 나왔어요!
금속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종소리.
뎅.
서진의 심장이 함께 울렸다. 그는 비틀거렸고, 이수가 붙잡았다.
장부 페이지에 이름들이 번졌다. 사망자 명단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검게 지워져 있었다. 단 하나의 이름만 읽을 수 있었다.
한수연
엄마가 숨을 멈췄다.
"엄마 이름이야."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외할머니?"
윤미정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만졌다.
"우리 엄마가 그날 죽었다고 들었어. 사고였다고. 그런데..."
장부가 다시 넘어갔다.
한수연 - 첫 번째 종지기
민재가 작게 말했다.
"종지기?"
기록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깜빡였다. 빛이 꺼졌다 켜질 때마다 방 한가운데에 한 여자의 그림자가 생겼다. 젊은 여자였다. 엄마와 닮은 얼굴. 손에는 아이를 감싸 안은 자국처럼 피가 묻어 있었다.
엄마가 한 걸음 다가갔다.
"엄마?"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글자가 피처럼 번졌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종을 울렸다.
이수가 낮게 말했다.
"종을 울린 사람의 이름."
서진은 윤재하의 말을 떠올렸다.
세 가지를 찾아라.
종을 울린 사람의 이름.
"한수연."
서진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록실 벽의 서류함들이 한꺼번에 열렸다. 종이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종이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온고 학생, 교사, 동네 사람들, 사고의 목격자, 잊힌 사람들.
하지만 이름들은 모두 중간이 끊겨 있었다.
한__연
문__린
강__현
윤__진
장부가 떨렸다.
첫 조건 확인.
스피커가 없는 기록실에서 정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종을 울린 사람: 한수연.
엄마는 울면서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림자는 엄마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말하면 네가 돌아올까 봐."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모두에게 들렸다.
"나는 아이들을 살리려고 종을 울렸고, 종은 살아남은 아이들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정아, 너만은 이 동네를 떠나길 바랐다."
엄마는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근데 내가 다시 서진이 때문에..."
"너는 네 아이를 살렸다."
한수연의 그림자는 서진을 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제 종을 끊으러 왔구나."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조건은 뭐예요? 종을 멈춘 사람의 죄."
그림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종을 멈춘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요?"
"죄를 덮은 사람이다."
장부의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갔다. 1974년 사진 위에 1999년 시계탑 사진이 겹쳤다. 그리고 한 이름이 검게 떠올랐다.
강유석
지후가 숨을 삼켰다.
"유석 선생님..."
한수연의 그림자가 말했다.
"그는 첫 번째 정오의 기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지운 기록 위에 다시 종을 세웠다."
장부가 저절로 닫혔다.
철문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뎅.
기록실의 모든 서류함에 붉은 실이 감겼다.
두 번째 조건 확인을 위해 증인을 소환합니다.
벽이 갈라지며 낡은 교장실 문이 나타났다.
문패에는 오래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유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