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32화: 네 번째 조건
상담실 창문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다. 대신 물렁한 막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납작해졌다. 창밖의 운동장은 낮의 학교가 아니라 밤의 병원, 1999년의 방송부실, 초등학교 앞 사거리가 번갈아 비쳤다.
서진의 손목에서 뻗은 붉은 실들은 그 장면들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졌다.
"회수라니."
민재가 책상을 잡아당겨 문 앞에 세웠다.
"무슨 빚쟁이도 아니고 진짜 짜증나게 말하네."
이수는 서진의 손목을 살폈다. 실은 만져지지 않았지만 보였다. 가까이 보면 각각의 실 안에 작은 장면들이 흐르고 있었다. 윤재하의 사고, 엄마의 병실, 문하린의 방송, 이름 없는 선배의 검은 명찰.
"실이 전부 서진이한테 연결됐어."
소라가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림이 안 움직여."
페이지에는 낡은 철문만 그려져 있었다. 문 위에는 글자가 하나씩 새겨졌다.
기록실은 회수 전 마지막 확인 장소입니다.
지후가 수신기를 켰다.
"아까 1974년이라고 했어. 해온고가 세워진 해랑 맞나?"
이수가 기억을 더듬었다.
"해온고 개교가 1975년이야. 1974년이면 공사 중이었거나, 학교가 생기기 전 부지 기록일 수 있어."
엄마는 아직 서진의 팔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지하 기록실? 회수? 서진아, 엄마한테 설명해."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설명할 말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엄마가 나 살린 날부터 이어진 일이야. 이번에는 내가 끝내야 해."
"너 혼자 못 해."
"혼자 안 해."
그 말에 민재가 책상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하지. 혼자 하려고 하면 내가 먼저 때릴 거야."
엄마는 민재를 보며 잠깐 멍해졌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그녀를 조금 붙잡아 주었다.
상담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담임이었다.
"윤서진 어머님, 상담이 길어지시는데..."
문이 열리는 순간, 담임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는 상담실 안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미간만 찌푸렸다.
"어? 여기가 왜..."
그의 손목에 가는 검은 선이 감겼다.
이수가 빠르게 말했다.
"선생님도 휘말리고 있어."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나가세요."
담임은 대답하지 못했다. 검은 선은 그의 손목에서 목까지 올라가며 작은 글자를 만들었다.
무관자 정리
지후가 이를 악물었다.
"정오가 이제 모르는 사람들을 치우기 시작했어."
서진은 담임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실이 만져졌다. 차가운 철사 같았다.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은 상관없어."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렀다.
정오는 상관없는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검은 선이 더 조였다. 담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마가 서진을 밀치고 담임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해요!"
그녀의 손목에도 붉은 실이 떠올랐다. 엄마의 실은 서진의 것보다 희미했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기존 계약자 확인.
목소리가 바뀌었다.
윤미정. 대리 상환 권한 없음.
엄마가 이를 악물었다.
"권한 같은 거 몰라. 내 아들이랑 이 선생님 놔."
그 순간 상담실 문 밖에서 또 다른 손이 들어왔다.
도겸이었다.
그는 검은 우산 대신 강유현의 학생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뒤에는 서해린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전보다 더 희미했다.
"기록실로 가."
도겸이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막을게."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 몸도 거의..."
"그래서 여기서 막을 수 있는 거야. 산 사람보다 규칙 사이에 낀 사람이 문턱을 잘 붙잡아."
서해린이 이름 없는 선배의 빈 명찰 조각을 들어 보였다. 전에 되찾았던 이름, 서해린은 이제 그녀에게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떠날 곳을 정한 사람처럼 차분했다.
"기록실에 가면 하린이의 첫 방송을 찾아. 우리가 못 들었던 첫 번째 문장."
이수가 물었다.
"그게 조건 중 하나예요?"
서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를 끝내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지? 그런데 그건 정오가 알려준 조건이야."
도겸이 말을 이었다.
"하린 선배는 네 번째 조건을 남겼어. 정오가 숨긴 조건."
민재가 낮게 욕을 삼켰다.
"네 번째는 또 뭔데요?"
서해린은 서진을 보았다.
"남는 사람을 정하지 않는 것."
상담실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서진의 가슴 한가운데 박혔다. 그는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누가 남아야 할까. 자신이면 될까. 자신이 모든 실을 받아 안으면 끝날까. 서해린은 그것을 들킨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린이는 혼자 남으려고 해서 실패했어. 유현이는 혼자 기억하려 해서 무너졌고. 도겸이는 혼자 지키려 해서 사라질 뻔했지."
도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반박은 못 하겠네."
서해린은 말했다.
"정오는 희생을 좋아해. 누군가 혼자 남겠다고 말하는 순간 문을 열어 주는 척하면서 그 사람을 영원히 묶어. 그러니까 끝내려면 아무도 버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해."
스피커가 날카롭게 울렸다.
불필요한 증언 감지.
상담실 천장에서 검은 물이 쏟아졌다. 도겸이 학생증을 들어 올리자 물줄기가 허공에서 멈췄다. 강유현의 이름이 빛났다.
"가!"
이수가 문을 열었다. 상담실 밖 복도는 더 이상 평범한 학교 복도가 아니었다. 바닥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낡은 콘크리트 계단. 끝에는 철문이 보였다.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여기 있어."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엄마."
"이번엔 너 혼자 안 보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수가 짧게 판단했다.
"기존 계약자라면 기록실에서 필요한 기억이 있을 수 있어. 같이 가는 게 나아."
민재가 담임을 부축해 문 밖으로 밀어냈다.
"선생님은 현실 쪽으로 보내고요."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서진은 마지막으로 상담실을 돌아봤다. 도겸과 해린이 문 앞에 섰고, 검은 물이 그들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꼭 돌아올게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이번엔 그런 말 말고, 다 같이 나와."
서진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문 위에는 녹슨 글씨가 붙어 있었다.
지하 기록실
그리고 그 아래,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 쓴 문장.
첫 종은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