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30화: 이름 모를 구원자
비는 아래에서 위로 내리고 있었다.
도로의 물웅덩이에서 빗방울이 솟아 하늘로 올라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뒤로 흐르고, 사람들의 비명은 입속으로 되감겼다. 초등학교 5학년의 사고 현장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미끄러진다.
핸들이 꺾인다.
어린 서진이 공책을 들고 멈춰 선다.
운전자가 가로수를 들이받는다.
그리고 피투성이 얼굴로 말한다.
"애는... 살려주세요."
다시 처음으로.
서진은 무릎을 꿇었다.
"그만."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춘 채 반복됐다. 이곳은 루프의 원점이 아니라 서진의 빚이 보관된 장소였다.
어린 서진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저 아저씨 이름 알아?"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럼 못 나가."
어린 자신의 목소리는 잔인할 만큼 담담했다.
"이름을 알아야 돌려줄 수 있어."
서진은 운전자에게 다가갔다. 비가 거꾸로 올라가는 도로 위에서 그는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헬멧은 깨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나이는 서른쯤 되었을까. 아니, 비와 피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사고 장면은 다시 되감겼다.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오토바이가 미끄러지기 전으로 뛰어갔다. 그는 어린 자신을 붙잡으려 했다. 손이 통과했다. 과거는 바뀌지 않았다.
"야! 공책 줍지 마!"
어린 서진은 듣지 못했다.
오토바이가 다시 미끄러졌다.
운전자가 다시 핸들을 꺾었다.
충돌.
"애는... 살려주세요."
서진은 귀를 막았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진!"
그는 고개를 들었다.
횡단보도 반대편에 한이수가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 민재, 소라, 지후도 있었다. 네 사람은 붉은 실을 붙잡고 있었다. 상담실에서 끊어지지 않은 실을 따라온 것이다.
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야, 친구 버리고 혼자 비극 찍지 말랬지!"
서진은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어떻게 왔어?"
이수가 손목의 붉은 자국을 보여주었다.
"네 이름을 계속 불렀어. 실이 반응했어."
소라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네가 있던 곳을 그렸어."
지후는 수신기를 들었다.
"사고 당시 신고 기록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장소가 병원, 경찰, 방송 기록이랑 연결돼 있어."
서진은 운전자를 돌아봤다.
"이름을 알아야 해."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부터 찾자. 사고 현장이면 번호판, 배달통, 신고 내용, 병원 이송 기록."
사고 장면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모두가 움직였다. 민재는 오토바이 뒤쪽으로 달려가 번호판을 확인했다.
"서울... 숫자가 흐려! 43? 48?"
소라는 재빨리 오토바이를 그렸다. 그림 속 번호판을 확대하듯 선을 덧그었다.
"끝자리 17."
민재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도 17이냐."
지후는 수신기를 켰다. 잡음 사이에서 119 신고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 해온초 앞 사거리인데요! 오토바이 사고요! 애도 있어요!
다른 목소리.
환자 성함 확인되나요?
잡음.
배달 기사분 같은데... 가방에 이름이...
소리가 끊겼다.
이수가 사고 현장 옆으로 뛰어갔다. 도로 위에는 찢어진 배달 가방이 떨어져 있었다. 음식 포장지와 영수증이 흩어져 있었다. 이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수증에 업체명이 있어. 한빛분식."
서진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초등학교 앞 작은 분식집. 떡볶이 냄새, 노란 간판, 늘 웃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가던 남자.
"나 알아."
그는 중얼거렸다.
"한빛분식 아저씨."
하지만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였던 서진은 어른들의 이름을 잘 몰랐다. 그냥 분식집 아저씨, 배달 아저씨, 웃긴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린 서진이 말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알아."
현재의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이름을 찾아야 해."
사고 장면이 다시 충돌 직전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도로 건너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젊은 엄마였다. 윤미정은 병원 근무복 위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사고 현장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서진아!"
그녀는 어린 서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쓰러진 운전자를 보았다.
"오빠..."
서진의 몸이 굳었다.
엄마가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친척이었어?"
서진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외가 이야기는 늘 짧게 끝났다. 바쁘다, 멀리 산다, 연락 안 한다. 그 정도였다.
엄마는 쓰러진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재하 오빠, 정신 차려!"
이름.
재하.
하지만 성은?
지후의 수신기에서 끊겼던 신고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환자 성함 확인됐습니다. 윤재하. 남성, 삼십이 세. 의식 희미합니다.
서진은 숨을 들이켰다.
"윤재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고 현장의 비가 멈췄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그는 서진을 보았다. 어린 서진이 아니라 현재의 서진을.
"많이 컸네."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따뜻했다.
서진의 눈앞이 흐려졌다.
"저 때문에..."
"아니."
윤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가 아니야. 내가 선택한 거야."
"근데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어요?"
그의 얼굴에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말하면 네가 평생 그날에 갇힐까 봐."
서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윤재하의 손목에도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그는 그 실을 들어 보였다.
"나는 네 정오를 대신 묶었어. 네 엄마는 그 뒤에 네가 다시 끌려가지 않게 자기 시간을 덧댄 거고."
엄마의 거래도 진짜였다. 다만 첫 번째가 아니었을 뿐.
윤재하는 서진의 손목에 감긴 실을 보았다.
"이제 네가 선택해야 해. 내 이름을 돌려주면 나는 풀려나. 대신 네 정오는 다시 네게 돌아간다."
민재가 바로 말했다.
"다른 방법 찾자."
이수도 말했다.
"대가를 나누는 방식이 또 가능할 수 있어."
윤재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빚이 아니라 선물이었어. 선물은 나눌 수 있지만, 돌려받을지 말지는 받은 사람이 정해야 해."
서진은 손목의 붉은 실을 내려다봤다.
두려웠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윤재하. 엄마의 오빠. 자신을 살린 사람.
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재하."
붉은 실이 풀리기 시작했다.
"제 정오를 돌려받겠습니다."
사거리 위로 거대한 시계 그림자가 내려왔다.
멀리서 깨진 종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서진의 심장 안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