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29화: 정오를 빚진 아이
붉은 실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웠다. 오래된 병원 침대 시트처럼, 비 오는 날 젖은 교복 소매처럼 차가웠다. 서진은 손목에 감긴 실을 풀어내려 했지만 손가락이 닿지 않았다. 실은 피부 위가 아니라 시간 안쪽에 감긴 것 같았다.
"서진아!"
엄마가 그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서진의 어깨를 통과했다. 엄마는 살아 있는 현실의 사람인데도 이 방에서는 환영처럼 흔들렸다.
이수가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어머님이 정오와 계약했지만, 대가가 바로 치러지지 않은 거예요."
지후가 수신기를 들여다봤다.
"방송이 바뀌고 있어."
스피커 없는 병실에서 여러 목소리가 겹쳤다.
미납된 정오.
보류된 회수.
대상자 윤서진.
민재가 서진 앞에 섰다.
"뭘 회수한다는 건데?"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위 어린 서진이 눈을 떴다.
어린 서진은 현재의 서진을 보았다.
"너 누구야?"
서진은 입술을 떨었다.
"나야."
"나?"
어린 서진은 손목의 붉은 실을 내려다봤다.
"엄마가 울어서 내가 돌아왔대."
그 목소리는 너무 평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근데 누가 말했어. 나중에 갚아야 한다고."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말 없었어. 나는 못 들었어."
어린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울고 있어서 못 들었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서진은 천천히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다.
"뭘 갚아야 하는데?"
어린 서진은 침대 옆 모니터를 가리켰다. 심전도 그래프가 12시 17분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내가 살아난 시간."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페이지 한가운데에 검은 글자만 떠올랐다.
윤서진은 이미 한 번 회수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민재가 소리쳤다.
글자는 천천히 바뀌었다.
현재의 윤서진은 반환 유예 상태입니다.
이수의 얼굴이 굳었다.
"서진이가 살아 있는 게 임시라는 뜻이야."
엄마가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이 살려달라고 한 게 잘못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서진은 엄마를 보았다. 어린 시절 공개수업에 늦게 왔던 엄마, 야근 메모를 남기던 엄마, 지친 얼굴로도 삼각김밥을 챙겨두던 엄마. 그리고 자신의 침대 옆에서 정오와 거래한 엄마.
원망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원망보다 더 큰 것은 공포였다. 엄마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혼자 얼마나 오래 죄책감을 품었을지 상상하는 것이 무서웠다.
"엄마."
서진이 불렀다.
엄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 살리고 싶었지?"
"당연하지."
"그럼 됐어."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돼. 너 지금 또 끌려가게 생겼는데 뭐가 돼!"
서진은 웃지 못했다. 대신 손목의 붉은 실을 보았다.
"이번엔 내가 갚을지 말지 결정할 거야."
병실 천장이 갈라졌다. 그 위로 시계탑의 종이 보였다. 깨진 종은 아직도 검은 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물이 병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회수 절차를 시작합니다.
어린 서진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몸은 점점 검게 변했다. 회수자가 아니라, 빚의 증서처럼 보였다.
어린 서진은 현재의 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디로?"
"처음 죽었던 곳."
상담실 바닥이 무너졌다.
서진은 떨어지며 엄마의 비명을 들었다. 민재와 이수, 소라, 지후가 손을 뻗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붉은 실이 서진만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가 떨어진 곳은 학교 앞 사거리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1999년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거리였다. 횡단보도 앞에는 어린 서진이 서 있었고, 도로 저편에서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서진은 기억해냈다.
그날 그는 사고를 당할 뻔한 게 아니었다.
이미 당했다.
어린 서진은 공책을 줍기 위해 도로로 뛰어들었다. 오토바이는 빗길에 미끄러졌고, 운전자는 핸들을 꺾었다. 오토바이는 서진을 피하려다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운전자는 쓰러졌다.
서진은 살았다.
아니, 살았다고 믿었다.
어린 서진 옆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정오를 바치면 아이를 돌려주겠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향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가로수 아래 쓰러진 오토바이 운전자였다.
그는 피투성이 얼굴로 어린 서진을 보며 손을 뻗었다.
"애는... 살려주세요."
서진의 숨이 멎었다.
엄마의 거래가 아니었다.
첫 번째로 그를 살린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운전자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이 서진의 정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