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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27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27화: 학생증

도겸은 강유현의 학생증을 집어 들지 못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손을 뻗었다가 멈추고, 다시 뻗었다가 멈췄다. 학생증은 낡은 플라스틱 조각일 뿐인데, 그것을 드는 순간 유현이 정말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 같았다.

서해린이 대신 학생증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유현의 이름을 엄지로 쓸었다. 이름은 더 이상 흐려지지 않았다.

"강유현."

그녀가 불렀다.

복도 어디선가 아주 작은 바람이 불었다. 대답은 없었다.

도겸은 고개를 숙였다.

"또 늦었네."

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는 너무 얇고, 침묵은 너무 무거웠다. 결국 그는 도겸 옆에 앉았다.

"선배가 기억했잖아요."

도겸은 학생증을 보았다.

"기억하는 게 구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없던 일로 만들진 않아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후의 수신기에서 잡음이 흘렀다. 이번엔 방송이 아니라 여러 장소의 소리가 섞여 있었다. 지하철 안내음, 아파트 엘리베이터 도착음, 강바람 소리, 병원 호출음.

이수가 지도처럼 변한 소라의 스케치북을 펼쳤다.

"병원 문 하나는 닫혔어."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에서 병원으로 이어지던 선이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들은 더 진해졌다. 특히 오래된 아파트 단지 쪽 선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민재가 지도를 들여다봤다.

"다음 목적지가 저기라는 뜻?"

"그런 것 같아."

"잠깐만. 우리 학교는?"

모두가 뒤를 돌아봤다. 병원 복도 끝에 과학실 문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문 너머로 아이들의 소리와 점심시간의 소란이 들렸다.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후 12시 41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이었다. 이상했다. 체감상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현실 시간은 20분 남짓 흘렀다.

이수가 말했다.

"문 안쪽 시간과 현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아. 아직 학교로 돌아갈 수 있어."

민재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다."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민재는 계속 말했다.

"밥 먹고 싶고, 쉬고 싶고, 그냥 선생님한테 혼나는 게 그립다. 근데 저 선들이 계속 진해지는 거 보면 우리가 안 가면 누가 휘말릴 거잖아."

소라가 작게 말했다.

"내 이름도 누가 불러줘서 돌아왔으니까."

지후는 수신기를 껐다.

"방송은 계속 새고 있어. 내가 막아볼게. 학교로 돌아가면 방송실 장비를 써서 잔해 위치를 더 정확히 잡을 수 있어."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작정 다음 문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해. 준비가 필요해."

도겸이 그제야 학생증을 받아 들었다. 그는 유현의 이름을 보며 말했다.

"난 남을게."

서진이 바로 물었다.

"어디에요?"

"문 근처. 잔해들이 학교 안으로 더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해."

"혼자?"

도겸은 서진을 보았다.

"검은 우산도 없고, 예전처럼 오래 버티지도 못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엔 필요해."

"같은 사람이 뭔데요?"

"돌아갈 곳이 아직 애매한 사람."

그 말에 서해린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남을게."

도겸이 그녀를 보았다.

"이름 찾았잖아요. 가도 돼요."

"어디로?"

서해린은 조용히 웃었다.

"내가 돌아갈 1999년은 이미 없어. 하린이도, 유현이도, 하율이도 이제 내가 알던 시간에 있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은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할래."

도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서진은 유현의 학생증을 보았다. 유현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았다. 이름이 남는다는 건 끝이 아니라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과학실 문을 통해 학교로 돌아왔다.

교실로 올라가자 점심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담임은 다섯 명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어디 갔다 왔어?"

민재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보건실이요."

"다 같이?"

"단체로 배가 아파서요."

담임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진을 향해 말했다.

"윤서진, 너 어머니 오셨다. 상담실에 계셔."

서진의 심장이 멈칫했다.

"저희 엄마요?"

"그래. 아까부터 기다리셨어."

서진은 복도 끝 상담실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병원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 위 시계는 12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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