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26화: 죽지 못한 시간
병원 복도는 길어졌다.
뒤돌아보면 과학실 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은 사라지고, 대신 끝없는 병실 문들이 이어졌다. 각 문 위에는 이름표 대신 시간이 적혀 있었다.
1999.06.14 12:17
2006.09.03 12:17
2015.11.21 12:17
2026.05.27 12:17
민재가 문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정오야."
"정확히는 12시 17분."
이수가 말했다.
"원래 죽음이 일어났어야 할 시간이거나, 누군가가 시간을 바꾼 지점일 가능성이 높아."
문하율의 모습을 한 아이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장난감 자동차가 그의 발밑에서 굴러갔다.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검은 시곗바늘 자국이 남았다.
서해린이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율아."
아이가 돌아봤다.
"나는 하율이가 아니야."
"그래도 그 애의 시간이잖아."
"시간은 사람이 아니야."
아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서진은 그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루프 속 검은 우산을 들고 있던 도겸, 그림자 없는 유현, 이름을 잃어가던 소라. 탑에 먹힌 것들은 모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괴물이 아니라, 오래 갇혀서 괴물처럼 보이게 된 것들.
응급실 표시등이 깜빡였다.
12:16
"카운트다운이 줄어들고 있어."
지후가 말했다.
수신기에서 응급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환자 도착 1분 전. 보호자는 대기해 주십시오.
유현의 얼굴이 굳었다.
"1999년 사거리 사고가 재현될 거야."
"막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민재가 말했다.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사고를 막는 게 목적이 아니야. 하율이는 이미 살았어. 문제는 그 사고의 죽음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시간들에 붙은 거지."
이수가 빠르게 정리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건 사고를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죽음이 누구에게 전가됐는지 찾는 거예요."
문하율의 시간은 응급실 문 앞에 섰다.
"정답."
문이 열렸다.
안쪽은 병실이 아니었다. 1999년 사거리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병원 천장처럼 하얬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17에서 멈춰 있었고, 도로 중앙에는 어린 문하율이 서 있었다. 멀리서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문하린은 없었다.
대신 도로 반대편에 한 학생이 서 있었다.
서해린.
그녀는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1999년의 서해린은 문하율을 발견하고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의 서해린이 숨을 삼켰다.
"나였어."
서진은 그녀를 보았다.
"하율이를 구한 사람이 선배였어요?"
서해린은 기억이 돌아오는 듯 얼굴을 감쌌다.
"하린이가 탑으로 뛰어가고, 유현이가 따라갔어. 나는 하율이를 찾으러 정문 밖으로 나갔고..."
사거리의 시간이 움직였다.
어린 하율이 장난감 자동차를 줍느라 도로 한가운데 멈췄다. 덤프트럭의 경적이 울렸다. 살아 있는 서해린이 뛰었다.
현재의 서해린이 소리쳤다.
"안 돼!"
하지만 과거의 그녀는 들을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서해린은 하율을 밀쳤다.
하율은 인도 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트럭은 서해린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트럭 범퍼가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 붉은 실이 허공에서 내려와 서해린의 손목을 묶었다. 시계탑 방향에서 강유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을 주면 죽음을 미뤄주겠다.
현재의 서해린은 무너질 듯 떨었다.
"나는... 하율이를 살리려고..."
유현이 눈을 감았다.
"그래서 네 이름이 회수됐구나."
서진은 상황을 이해했다. 하린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하율을 구한 건 서해린이었다. 탑은 서해린에게 이름을 요구했고, 유현은 그 이름을 붙잡으려다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
모두가 서로를 구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갇혔다.
사거리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려 했다.
12:17
이번엔 트럭이 과거의 서해린이 아니라 현재의 서해린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민재가 소리쳤다.
"피해!"
서해린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름을 되찾은 순간, 미뤄졌던 죽음도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서진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더 빨랐다.
강유현.
반쯤 투명한 그는 서해린 앞에 섰다. 돌아온 그림자가 바닥에서 길게 뻗어 트럭의 바퀴를 붙잡았다.
"이번엔 내가 숨기지 않을게."
유현이 말했다.
"서해린은 하율이를 구했다. 문하린은 동생을 사랑했다. 강유현은 겁이 나서 이름을 숨겼다."
트럭이 멈췄다.
유현의 그림자가 산산이 갈라졌다.
서해린이 울부짖었다.
"유현아!"
사거리가 하얗게 무너졌다.
눈을 떴을 때, 모두는 병원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응급실 표시등은 꺼져 있었다.
강유현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그의 학생증만 남아 있었다.
이름 칸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떠 있었다.
강유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