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25화: 그림자가 돌아온 날
강유현의 그림자는 돌아왔다.
하지만 몸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순을 보는 일은 기묘했다. 과학실 바닥에 그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는데, 정작 유현의 어깨와 팔은 유리처럼 투명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흐린 빛이 그의 몸을 통과해 실험대 위에 닿았다.
도겸은 말없이 유현의 앞에 섰다.
"왜 매번 이렇게 혼자 정리하려고 해요?"
유현은 피곤하게 웃었다.
"선배 버릇인가 보지."
"재미없어요."
"알아."
서해린은 자기 이름이 돌아온 명찰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뒤 그녀의 모습은 훨씬 선명해졌지만, 완전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교복 끝은 아직 안개처럼 흔들렸고, 발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이수가 유현의 상태를 살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건 이름을 돌려준 만큼 선배님의 존재가 빠져나간다는 뜻 같아요."
민재가 바로 말했다.
"그럼 다시 돌려받으면 되잖아. 선배님 이름, 강유현. 계속 부르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1999년에 한 번 죽었고, 2026년까지 탑의 잔해에 붙어 있었어. 그림자가 없었던 건 내 시간이 이미 다 떨어졌다는 뜻이었지. 지금 돌아온 그림자는 내가 다시 살아난 증거가 아니라, 끝낼 시간이 됐다는 표시야."
"그런 말 하지 마요."
도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친구들 이름 기억해준 사람이 선배님이잖아요."
유현은 도겸을 바라봤다.
"그래서 너는 이제 혼자 기억하지 않아도 돼."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과학실 바깥 복도가 흔들렸다. 문틈 아래로 하얀 빛이 새어 들어왔다. 서진이 문을 열자 복도는 더 이상 학교 복도가 아니었다.
병원 복도였다.
낯익은 소독약 냄새, 바닥의 회색 줄무늬, 벽에 붙은 야간 진료 안내. 서진은 숨이 막혔다. 엄마가 일하는 병원과 비슷했다.
하지만 복도 끝에는 해온고 학생들이 서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링거대를 끌고, 졸업앨범을 들고, 시험지를 움켜쥔 아이들. 그들은 모두 흐릿했다. 종에서 풀려난 이름들이 각자의 후회와 엉킨 채 학교 밖 장소로 번지고 있었다.
지후가 수신기를 귀에 댔다.
"방송이 학교 밖으로 새고 있어. 병원, 지하철역, 아파트 단지... 누군가의 시간이 묶였던 장소들이 연결되고 있어."
이수가 말했다.
"종을 멈췄지만, 종 안의 시간을 정리하지 못했어. 그래서 현실로 흘러나오는 거야."
소라가 스케치북을 넘겼다. 빈 페이지 위에 저절로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해온고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선이 뻗어 나갔다. 병원, 사거리, 오래된 아파트, 폐쇄된 지하상가, 한강 둔치.
"문이 여러 개야."
민재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병원 복도에서 한 아이가 걸어왔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손에는 작은 장난감 자동차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서해린을 보자 멈췄다.
"누나."
서해린의 얼굴이 굳었다.
"하율아?"
문하린의 동생, 문하율.
하지만 하율은 살아 있어야 했다. 하린이 구하려 했던 아이. 탑이 거래의 미끼로 삼았던 아이. 1999년 그날, 사고를 당할 예정이었던 아이.
하율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하율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 위로 여러 아이의 목소리가 겹쳤다.
"하율이가 살면서 죽지 못한 시간들이야."
이수의 눈이 커졌다.
"죽지 못한 시간?"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동차가 병원 복도 바닥을 굴러가더니 갑자기 덤프트럭 소리를 냈다. 모두가 움찔했다.
"누나가 시간을 비틀어서 하율이는 살았어. 그런데 죽었어야 할 순간은 사라지지 않았어. 그 순간들이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붙었어."
서진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서 사고가 반복된 거야?"
아이의 눈이 검게 변했다.
"누군가가 살아남으면, 누군가는 대신 멈춰."
병원 복도 조명이 하나씩 꺼졌다.
유현이 중얼거렸다.
"탑의 심장은 종이 아니었어."
서진은 그를 돌아봤다.
"그럼 뭐였는데요?"
유현은 병원 복도 끝에 생겨난 거대한 문을 보았다. 문 위에는 응급실 표시등이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시등의 숫자는 12:17이었다.
"대체된 죽음들."
강유현이 말했다.
"우리가 살린 시간들이 쌓여서 새로운 탑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