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24화: 잘린 녹음
방송부실은 먼지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먼지는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책상을 쓸자 먼지가 물처럼 밀려났다. 1999년의 시간 조각이 완전히 굳지 못하고 현실 위에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오지후는 장비 앞에 앉았다.
"이건 아날로그 믹서예요. 테이프 재생기랑 연결돼 있고... 이쪽은 교내 방송 송출."
민재가 놀란 얼굴로 봤다.
"너 방송부장 맞긴 하구나."
"칭찬으로 들을게."
지후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열었다. 안에는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라벨은 반쯤 찢겨 있었고, 날짜만 남아 있었다.
1999. 6. 14.
이수가 말했다.
"재생하면 또 탑이 반응할 수 있어."
"이미 반응하고 있어."
서진은 창밖을 가리켰다. 방송부실 창문 너머로 보여야 할 것은 운동장이었다. 하지만 창밖에는 정문 앞 횡단보도가 보였다. 숫자 17이 깜빡이고 있었다. 현실의 공간들이 제멋대로 겹치고 있었다.
도겸은 문가에서 경계했다.
"짧게 들어. 이름 부분만 찾아야 해."
지후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잡음.
치직... 오늘 점심 방송은 쉽니다. 문하린 학생의 사고로 인해...
어린 강유현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불안했다. 말끝이 흔들렸고, 숨을 자주 삼켰다.
아니야. 사고 아니야.
여학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녹음 속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현아, 내 이름을 잊지 마. 내 이름은...
그 순간 테이프가 늘어지며 소리가 뒤틀렸다.
지후가 재생을 멈췄다.
"물리적으로 잘린 게 아니야. 신호가 먹혔어."
"복구할 수 있어?"
"장비만 보면 어려운데..."
그는 여학생을 보았다.
"목소리 주인이 여기 있잖아. 본인 기억과 녹음을 맞추면 빈 부분을 열 수 있을지도 몰라."
여학생은 손을 자기 목에 댔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름을 되찾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소라가 조용히 다가갔다.
"나도 그랬어요. 사라지면 편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이름이 없으면 아픈 것도 내가 아픈 건지 모르게 돼요."
여학생은 소라를 보았다.
"되찾으면 아플 수도 있어요."
소라는 스케치북을 가슴에 안았다.
"그래도 내 거예요."
여학생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는 마이크를 여학생 앞에 놓았다.
"소리는 안 나도 괜찮아요. 입모양만 맞춰 주세요."
테이프가 다시 돌아갔다.
유현아, 내 이름을 잊지 마. 내 이름은...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후가 믹서의 노브를 조정하자 잡음 사이에서 희미한 파형이 생겼다.
이수는 여학생의 입모양을 읽으려 했다.
"서...?"
민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선? 설?"
유현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니야. 분명 더 길었어. 내가 알았는데..."
녹음이 갑자기 역재생되기 시작했다.
...은름이 내 .마 지잊 을름이 내 ,아현유
방송부실 벽에 검은 물이 번졌다. 물은 글자가 되었다가 다시 흘러내렸다. 수십 개의 이름 조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
린
윤
아
해
나
소라가 재빨리 그 글자들을 스케치북에 옮겼다.
"다 섞였어."
이수가 말했다.
"탑이 회수한 다른 이름들이랑 섞인 거야."
도겸이 벽을 보다가 굳었다.
"저기."
벽 한쪽에 다른 글자보다 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서해린은 기억하지 마.
순간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유리 긁히는 듯한 소리였지만, 분명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유현이 한 걸음 다가갔다.
"서해린."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방송부실의 모든 장비가 켜졌다. 스피커, 마이크, 카세트, 천장에 달린 낡은 방송등까지 동시에 붉게 빛났다.
여학생의 명찰에 글자가 떠올랐다.
서해린
그녀는 자신의 명찰을 내려다봤다. 눈물이 검은색에서 투명한 색으로 바뀌었다.
"서... 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송부실 문이 닫혔다. 창밖의 횡단보도 숫자 17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16
15
14
지후가 장비를 꺼보려 했지만 스위치가 말을 듣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강유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회수 기록이 복구되었습니다. 회수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유현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도겸이 소리쳤다.
"선배!"
유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서해린이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이름 때문에 또 누가 사라지는 건 싫어."
유현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을게."
그의 발밑에 그림자가 생겼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그림자였다.
"내가 빼앗은 이름은 서해린."
유현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이름은 강유현."
방송부실의 불이 꺼졌다.
카운트다운은 12에서 멈췄다.
하지만 유현의 몸은 반쯤 투명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