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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23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23화: 강유현의 빈 그림자

강유현은 과학실에 있었다.

정오 이후의 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그 과학실. 하지만 이제 문을 열어도 끝없는 복도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실험대와 비커, 오래된 암막 커튼, 벽에 걸린 주기율표가 보였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 정상적인 풍경 한가운데 강유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감긴 붉은 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은 이미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끊어진 실 끝에서 검은 물이 한 방울씩 맺혔다.

"왔구나."

그가 말했다.

서진은 졸업앨범을 책상 위에 올렸다.

"이거 설명해주세요."

앨범 마지막 장의 글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첫 번째 회수자: 강유현

유현은 글자를 오래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진을 더 불안하게 했다.

이수가 차갑게 말했다.

"알고 있었네요."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일부는 알고 있었죠."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가 참지 못하고 책상을 쳤다.

"아니, 선배님들은 왜 다 중요한 걸 일부만 알아요? 사람 미치게."

도겸이 조용히 말했다.

"유현 선배."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두려움이 더 많았다.

"정말 이름을 빼앗았어요?"

유현은 한참 침묵했다. 창밖에서는 정상적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실 창틀 아래로 검은 물이 실처럼 흘러내렸다.

"처음엔 이름을 빼앗는다는 걸 몰랐다."

그가 입을 열었다.

"1999년에 하린이가 사라진 뒤, 학교는 이상해졌어. 사람들은 하린이를 잊기 시작했다. 유석 형도, 시계탑도, 그날의 방송도 전부 흐려졌지. 나만 기억했다."

그는 여학생을 보았다. 이름 없는 선배는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애는 하린이 친구였어. 하린이가 탑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으려 했지. 그래서 탑은 그 애를 먼저 지우기 시작했다."

소라가 작게 말했다.

"소라처럼..."

"그래. 나는 막고 싶었다. 이름을 기억하면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그 애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럼 좋은 거잖아요."

민재가 말했다.

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탑은 기억을 거래로 바꿨다. 내가 그 애 이름을 붙잡을수록, 그 애의 이름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 애는 자기 이름을 잊었다."

이수가 낮게 물었다.

"선배님은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해요?"

유현의 손이 떨렸다.

"기억했어."

"했어?"

"종이 깨지는 순간 일부가 사라졌다. 너무 오래 혼자 품고 있었던 이름이라, 내 기억인지 그 애의 기억인지 구분이 안 돼."

이름 없는 여학생이 유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돌려달라는 듯했다.

유현은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그 말에 여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울음은 보였다. 그녀는 유현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손은 통과했다.

지후가 방송 장비의 잔해를 꺼냈다. 마이크는 거의 망가졌지만, 작은 수신기는 남아 있었다.

"방송 잡음 안에 이름 조각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요. 탑이 이름을 회수할 때 방송을 썼으니까."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시 방송 기록이나 카세트가 필요해."

도겸이 말했다.

"1999년 방송부실."

서진은 창밖 시계탑을 보았다.

"다시 과거로 가야 해요?"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과거로 갈 수 없어. 종이 깨졌으니까 길도 깨졌지. 대신 과거의 잔해가 현실에 섞여 들어오고 있다."

"잔해?"

그 순간 과학실 뒤쪽 준비실 문이 덜컥 열렸다.

안쪽은 방송부실이었다.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 90년대 포스터, 먼지 쌓인 믹서 장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학실과 1999년 방송부실이 붙어 있었다.

민재가 입을 벌렸다.

"이제 학교가 방탈출 카페가 됐네."

이수는 바로 들어가려다 멈췄다.

"잠깐. 아무 문이나 들어가면 안 돼. 이게 잔해라면 안쪽 규칙도 과거일 수 있어."

방송부실 안 스피커가 켜졌다.

치직.

이번에는 아주 어린 강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점심 방송은 쉽니다. 문하린 학생의 사고로 인해...

녹음이 끊겼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

여학생의 목소리였다.

아니야. 사고 아니야. 유현아, 내 이름을 잊지 마. 내 이름은...

날카로운 잡음.

이름이 나와야 할 순간만 잘려 있었다.

유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목소리..."

그는 비틀거리며 방송부실 문 앞에 섰다.

"나 때문에 잘린 거야."

이름 없는 선배가 그를 바라봤다.

유현은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네 이름을 숨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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