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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22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22화: 이름 없는 선배

횡단보도의 숫자는 17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차들은 완전히 멈춘 게 아니었다. 바퀴가 아주 느리게 굴렀고, 빗물이 보닛 위에서 한 방울씩 미끄러졌다. 사람들의 눈꺼풀도 느리게 깜빡였다. 학교 안에서 겪었던 완전한 정지와는 달랐다. 시간이 끈적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느려져 있었다.

여학생은 횡단보도 중앙에 서 있었다.

서진은 신호등 아래로 다가갔다.

"들려요?"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명찰은 새까맣게 번져 있었다. 이름은 읽을 수 없었다. 교복 가슴팍에는 해온고의 옛 교표가 달려 있었다. 소매 끝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릿했다.

이수가 말했다.

"몇 년도 학생이에요?"

여학생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 대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그녀는 당황한 듯 자기 목을 만졌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말을 못 하는 거면 써봐요."

그녀가 연필을 건넸다. 여학생은 연필을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통과했다. 소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스케치북을 여학생 앞에 들고, 자신이 직접 물었다.

"첫 글자라도 기억나요?"

여학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민재가 답답한 듯 머리를 긁었다.

"이름을 찾아달라는데 이름이 하나도 기억 안 나면 어떻게 찾아?"

지후가 교문 쪽을 돌아봤다.

"출석부. 졸업앨범. 학생 기록."

"1999년 이전일 수도 있어."

이수가 말했다.

"교복 디자인을 보면 90년대 후반은 맞아요. 그런데 문하린 선배와 같은 학년인지 다른 학년인지는 몰라요."

여학생은 문하린이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흐릿한 눈이 잠깐 선명해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무언가를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시계탑 쪽을 가리켰다.

"하린 선배를 알아요?"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가슴이 뛰었다.

"그럼 하린 선배가 죽던 날도 봤어요?"

여학생은 이번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벌렸다가, 손목을 붙잡히는 동작을 했다. 붉은 실. 계약. 그리고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이수가 낮게 말했다.

"본인이 그날 같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순간 횡단보도 끝 편의점 유리창에 금이 갔다. 유리 안쪽에 시계탑의 그림자가 비쳤다. 실제 시계탑은 학교 안에 있는데, 그림자는 학교 밖 건물들 위로 길게 뻗고 있었다.

여학생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신호등 숫자가 하나 줄었다.

16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멈춰 있던 차들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여기 있으면 치여요."

서진이 손을 뻗었지만 여학생의 팔을 잡을 수 없었다. 손이 안개를 통과하듯 지나갔다.

소라가 급히 스케치북에 횡단보도를 그렸다. 그리고 여학생의 발밑에 흰 선을 하나 더 그어 넣었다. 실제 도로 위에 희미한 흰 선이 생겼다. 여학생은 그 선을 밟자 조금씩 교문 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된다!"

민재가 외쳤다.

그들은 여학생을 데리고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신호등 숫자는 다시 17로 돌아갔고, 도로의 시간은 정상 속도로 흘렀다. 지나가던 차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보라를 튀기며 달렸다.

교문 안에 들어온 여학생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명찰의 검은 얼룩 한쪽이 벗겨졌지만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도겸이 본관 현관에 서 있었다.

서진은 그를 보자마자 안도했다. 그런데 바로 이상함을 느꼈다. 도겸은 더 이상 검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다. 우산은 이전에 부서졌다. 대신 그는 손에 낡은 졸업앨범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너희도 봤구나."

"선배는요?"

도겸은 앨범을 들어 보였다.

"종이 깨지면서 옛 이름들이 학교 곳곳에 흩어졌어. 일부는 사람 형태를 되찾았고, 일부는 장소에 붙었다."

이수가 물었다.

"그럼 이분도 그중 하나예요?"

도겸은 여학생을 보았다.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아."

여학생이 도겸을 바라봤다. 하지만 알아보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도겸은 졸업앨범을 펼쳤다. 낡은 사진들 사이, 한 군데가 까맣게 비어 있었다.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처럼 검은 얼룩만 남아 있었다. 이름 칸도 긁혀 있었다.

"문하린 선배와 같은 반이었어. 그리고 하린 선배가 탑으로 가던 날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사람."

서진이 물었다.

"이름은요?"

도겸은 고개를 저었다.

"앨범에서도 지워졌어."

여학생은 앨범의 빈자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투명하지 않고 잉크처럼 검었다.

그때 본관 스피커가 켜졌다.

치직.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하린도, 지후도, 강유석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이름은 주인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굳었다.

빼앗은 사람이 돌려줘야 합니다.

도겸의 손에 든 졸업앨범이 저절로 넘어갔다. 마지막 장에 검은 글자가 번졌다.

첫 번째 회수자: 강유현

서진은 숨을 삼켰다.

"강유현 선배가 이름을 빼앗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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