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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20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20화: 열일곱 번째 종소리

종 안쪽은 밤하늘 같았다.

시계탑 꼭대기에 매달린 낡은 종은 겉보기보다 훨씬 컸다. 안으로 들어서자 발밑에는 별처럼 빛나는 이름들이 떠 있었다. 하지만 별은 아름답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나하나가 학생증, 출석부, 낙서, 시험지, 졸업사진의 조각이었다.

김태윤

서미래

백도겸

강유석

박소라

소라는 자기 이름 앞에서 멈췄다. 이름은 아직 완전히 새겨지지 않았지만, 글자 끝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내 이름이 여기 있으면..."

"빼내면 돼."

민재가 말했다. 그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도겸은 종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검은 심장이 매달려 있었다. 심장이라기보단 시계추였다.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종 안의 이름들이 빛을 잃었다.

"저게 울림을 만든다."

지후가 마이크를 귀에 대고 말했다. 잡음 사이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내 이름을 불러줘."

"집에 가고 싶어."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전부 들려."

이수는 종 안쪽 벽을 살폈다.

"규칙이 있어요. 이름은 울림이 닿을 때마다 더 깊게 새겨져요. 반대로 누군가가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면 잠깐 떠올라요."

"그럼 다 부르면 되잖아?"

민재가 말했다.

이수는 벽 전체를 보았다. 이름은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였다. 완전히 지워진 이름은 글자조차 아니고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전부는 못 해."

그 말이 떨어지자 종이 흔들렸다.

첫 번째 울림.

서진의 무릎이 꺾였다.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하루가 밀려왔다. 알람 소리, 삼각김밥, 비, 성적표, 샤프심, 방송 잡음. 같은 하루가 겹치고 겹쳐 자신이 어느 하루의 윤서진인지 흐려졌다.

"윤서진!"

이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숨을 들이켰다. 이름이 닻처럼 그를 붙잡았다.

"고마워."

"서로 불러. 계속."

도겸이 말했다.

두 번째 울림.

소라의 몸이 투명해졌다. 민재가 바로 소리쳤다.

"박소라! 미술부! 우유 싫어하는 박소라!"

"싫어하는 건 아니고 못 마시는 거야!"

소라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다시 선명해졌다.

민재가 웃었다.

"봐, 디테일 중요하네."

세 번째 울림.

지후가 휘청였다. 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정오가 오면...

이수가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짝.

지후가 눈을 깜빡였다.

"아팠어."

"오지후. 방송부장. 사과를 나중으로 미룬 사람. 지금은 여기 있는 사람."

지후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여기 있어."

울림이 빨라졌다.

도겸은 검은 우산을 시계추 아래에 꽂았다. 우산살이 벌어지며 흔들리는 추를 붙잡았다. 엄청난 압력이 몰려왔다. 도겸의 팔에서 검은 문양이 번졌다.

"오래 못 버텨."

서진은 종 벽에 박힌 이름들을 보았다. 백도겸의 이름 옆에는 네 개의 흐릿한 얼룩이 있었다. 도겸의 친구들일 것이다.

"도겸 선배."

"왜."

"친구들 이름 알아요?"

도겸의 얼굴이 굳었다.

"...잊었어."

그 짧은 대답이 종 안쪽의 어떤 울림보다 아팠다.

유현이 종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다. 그림자가 없는 몸은 이곳에서 더 희미해 보였다.

"내가 알아."

도겸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네가 잊지 않으려고 나한테 말했었어. 매 루프마다. 혹시 네가 잊으면 불러달라고."

유현은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임가온."

종 벽의 얼룩 하나가 빛났다.

"최나래."

두 번째 얼룩이 글자가 됐다.

"문성우."

세 번째.

"장리호."

네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유현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어."

도겸은 우산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시계추가 멈칫했다. 종의 울림이 비명을 지르듯 찢어졌다.

강유석이 종 밖에서 외쳤다.

"멈추면 전부 쏟아진다!"

서진은 이해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종이 먹은 시간들을 받아낼 그릇이 필요했다. 유석은 한 명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도겸은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전의 문과 마찬가지였다. 한 명이 전부 받을 필요가 있을까?

"나눠."

서진이 말했다.

"또 나누자."

이수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울림을?"

"응. 이름도, 후회도, 시간도. 혼자 들고 있으니까 괴물이 되는 거잖아."

민재가 씩 웃었다.

"이번엔 좋은 멍청함 같네."

소라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녀는 종 안쪽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원은 다섯 조각으로 나뉘었고, 곧 여섯, 일곱 조각으로 늘어났다. 도겸, 유현, 하린, 유석의 몫까지.

지후는 마이크를 켰다.

"전교생, 아니, 여기 갇힌 모두에게 방송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종 안에 울렸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답하세요. 기억나지 않으면 옆 사람 이름부터 불러주세요."

처음엔 잡음뿐이었다.

그러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임가온.

다른 목소리.

최나래.

또 다른 목소리.

문성우. 장리호.

수백 개의 이름이 종 안에서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지워진 이름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얼룩은 글자가 되고, 글자는 빛이 되었다.

시계추가 멈췄다.

도겸의 우산이 산산이 부서졌다.

열일곱 번째 종소리는 울리지 못했다.

대신 종 전체가 갈라졌다.

검은 태양이 깨지고, 그 안에서 눈부신 정오의 빛이 쏟아졌다. 서진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 민재의 목소리, 이수의 목소리,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목소리.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눈을 떴을 때, 서진은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비가 오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오후 12시 18분.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민재가 젓가락을 든 채 얼어붙은 얼굴로 말했다.

"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넘어온 거 맞지?"

한이수가 창밖 시계탑을 보았다.

시계탑의 분침은 12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종탑 꼭대기에는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금 사이로 검은 물이 아직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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