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14화: 반장의 오답
한이수는 시험장에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책상은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모든 자리에는 시험지가 놓여 있었다. 벽시계는 12시 17분에 멈춰 있었지만 초침만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이수는 맨 앞자리에서 문제를 풀고 있었다.
등은 곧았고,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서진은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책상 아래에서 교복 치마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감독관 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한이수 학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이수와 닮았다. 더 정확히는 어른이 된 이수 같았다. 단정한 머리, 차가운 눈, 감정 없는 입매.
"틀리면 끝이에요."
이수는 답안지에 마킹했다.
서진이 다가가려 하자 바닥에서 붉은 선이 올라와 길을 막았다. 선 위에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입장할 수 없음.
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까지 공부를 시켜?"
소라는 스케치북을 펼쳤지만 종이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지후는 뒤늦게 합류했는지 방송실 문 모양의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이건 이수의 방이야."
지후가 말했다.
"우리가 대신 풀 수 없어."
시험지 위 문제가 허공에 떠올랐다.
문제 1. 한이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보기는 네 개였다.
1. 실패
2. 기대
3. 혼자 남는 것
4.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이수는 1번을 골랐다.
삐.
오답이었다.
교실 천장에서 형광등 하나가 꺼졌다. 이수의 책상 위에 두꺼운 참고서가 떨어졌다. 표지에는 틀린 사람의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감독관이 미소 지었다.
"전교 1등도 틀리는군요."
이수는 아무 말 없이 다음 문제를 풀었다.
문제 2. 한이수가 반장이 된 이유는?
보기.
1. 책임감
2. 선생님의 추천
3. 아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하려고
4. 모두를 돕고 싶어서
이수의 연필이 멈췄다. 그녀는 한참 동안 1번과 4번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4번에 표시했다.
삐.
또 오답.
이번에는 책상들이 한 칸씩 이수에게 가까워졌다. 빈 의자에 앉은 그림자들이 속삭였다.
"넌 착한 척했어."
"도와준 게 아니라 관리한 거잖아."
"사람들이 널 싫어하지 않게."
서진은 붉은 선을 두드렸다.
"한이수!"
이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감독관이 말했다.
"외부 소음은 감점입니다."
서진의 입이 막혔다. 소리 없는 공포가 목을 조였다. 민재가 붉은 선을 발로 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문제가 떠올랐다.
문제 3. 한이수가 가장 숨기고 싶은 오답은?
이번엔 보기가 없었다.
이수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연필 끝이 종이를 긁었다. 답안지에는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았다.
감독관이 속삭였다.
"모르면 백지로 내도 됩니다. 늘 그랬잖아요. 모르는 감정은 없는 척하면 되니까."
이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서진은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책상 위에 손을 올렸다. 붉은 선이 손등을 태웠다.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민재도 옆에 섰다.
"야, 반장! 들리면 책상 엎어!"
소라는 스케치북에 선 하나를 그었다. 종이에 그어진 선이 바닥의 붉은 선과 맞닿았다. 지후는 방송실에서 가져온 작은 마이크를 들었다.
"한이수."
그의 목소리가 교실 스피커로 울렸다.
"오답이어도 방송됩니다."
이수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답안지에 천천히 적었다.
나는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척했다.
교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감독관의 미소가 사라졌다.
"정답 처리할 수 없습니다. 문장이 너무 깁니다."
이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럼 서술형으로 채점하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안지를 찢었다.
붉은 선이 끊어졌다. 서진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한이수!"
이수는 그제야 뒤돌아봤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울음을 참는 얼굴도 아니었다. 오래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아니,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
민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 말이야?"
이수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나중에 설명할게."
시험장이 무너지고, 다섯 명은 다시 시계탑의 나선계단 위에 모였다. 위쪽에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하린의 목소리가 말했다.
너희가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내 거짓말도 들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