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갇힌 소년

13화: 친구의 비밀번호
한민재는 농구장에 있었다.
시계탑 안쪽에 웬 농구장이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바닥에는 초등학교 체육관의 낡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천장은 해온고 강당처럼 높았다. 벽마다 전광판이 붙어 있었는데 점수 대신 이름이 떠 있었다.
윤서진
윤서진
윤서진
하지만 글자는 한 글자씩 지워지고 있었다.
민재는 농구공을 든 채 코트 중앙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민재가 있었다. 키도 얼굴도 똑같지만 눈빛이 달랐다. 그 가짜 민재는 웃고 있었다.
"친구 이름 하나 기억 못 하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가짜가 말했다.
"어차피 걔도 널 완전히 아는 건 아니잖아."
민재는 공을 꽉 쥐었다.
"닥쳐."
"너 맨날 웃기만 했지. 집에서 무슨 일 있는지 말한 적 있어? 아버지랑 싸운 거, 농구 그만둔 거, 밤마다 게임 켜놓고 채팅창만 봤던 거. 말 안 했잖아."
서진은 코트 입구에서 멈췄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민재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수업 중에도 장난을 쳤고, 급식 메뉴에 별점을 매겼고, 시험을 망쳐도 "인생 밸런스 패치"라며 웃었다. 그래서 서진은 민재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가짜 민재가 서진 쪽을 보며 웃었다.
"봐. 왔네. 네가 제일 친하다고 믿었던 애."
민재가 뒤돌아봤다. 그의 눈에 잠시 반가움이 스쳤지만 곧 흐려졌다.
"너..."
서진은 바로 말했다.
"윤서진."
민재는 입술을 움직였다.
"윤... 서..."
전광판의 글자가 다시 밝아졌다가 꺼졌다.
가짜가 손뼉을 쳤다.
"아슬아슬하네."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치려 하자 가짜 민재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서 농구공들이 솟아올라 벽처럼 길을 막았다.
"여긴 일대일 코트야. 친구 관계도 결국 일대일이지."
서진은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뭘 하면 돼."
가짜 민재가 농구공 하나를 던졌다. 서진은 어설프게 받았다.
"간단해. 네 친구가 기억 못 하는 걸 네가 맞히면 돼. 세 번 안에."
"뭐를?"
"한민재의 진짜 후회."
민재가 소리쳤다.
"하지 마!"
그 반응만으로도 이 게임이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전광판에 떠올랐다.
한민재가 농구를 그만둔 이유는?
서진은 민재를 보았다. 민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쳤어?"
삐.
전광판이 붉게 변했다. 틀렸다.
가짜 민재가 웃었다.
"뻔한 답부터 가네."
두 번째 질문.
한민재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한 말은?
서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민재가 좋아하는 게임, 싫어하는 반찬, 자주 쓰는 말투는 알았다. 하지만 숨기고 싶어 한 말?
민재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만해."
서진은 그 입모양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도와줘."
전광판이 노랗게 깜빡였다. 완전한 정답은 아니었다.
가짜 민재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가깝네. 마지막."
세 번째 질문.
한민재가 윤서진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한 것은?
코트가 조용해졌다. 서진은 농구공을 내려놓았다.
"민재야."
민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한테 말 안 해도 돼. 근데 내가 몰랐다고 해서 네가 혼자였던 건 아니야."
가짜가 비웃었다.
"대답 회피?"
서진은 가짜를 보지 않았다.
"넌 나한테 늘 괜찮은 척했어."
민재의 어깨가 떨렸다.
"내가 힘들어 보이면 네가 더 힘들어질까 봐."
전광판이 멈췄다.
서진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웃으니까 진짜 괜찮은 줄 알았어. 미안해."
민재의 손에서 농구공이 떨어졌다.
그 순간 전광판에 답이 떠올랐다.
나도 무서워.
가짜 민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틀렸어. 그런 건 누구나 하는 말이야."
"그래서 못 했겠지."
서진이 말했다.
"누구나 하는 말인데, 제일 하기 어려우니까."
전광판의 윤서진이 다시 선명해졌다. 민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서진."
이번에는 또렷했다.
"야, 너 농구 진짜 못한다."
서진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살아 돌아오면 배우든가."
민재는 가짜 자신을 향해 농구공을 던졌다. 공은 허공에서 빛나며 전광판을 깨뜨렸다. 가짜 민재는 깨진 유리처럼 흩어졌다.
코트 출구가 열렸다.
민재는 서진 옆에 서며 작게 말했다.
"나 진짜 무서웠다."
"나도."
"그럼 비긴 걸로 치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한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있어?"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위태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