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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갇힌 소년12화

정오에 갇힌 소년

정오에 갇힌 소년

12화: 그림이 기억하는 이름

"박소라."

서진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했다.

"네 이름은 박소라야."

소라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수십 장의 그림이 타고 있었다. 미술실, 검은 우산, 시계탑, 정지된 빗방울, 다섯 개의 문. 불꽃은 이상했다. 종이를 태우는데 재가 남지 않았다. 그림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박... 소라."

그녀가 따라 말했다.

그러나 이름은 입안에서 부서지는 듯했다.

"내가 그 이름이었어?"

"응. 미술부. 파란 샤프. 우유는 늘 남기고, 그림 그릴 때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서진은 기억나는 것을 되는대로 말했다. 사소한 것일수록 중요했다. 탑은 이름부터 빼앗고, 그 다음엔 사소한 습관을 빼앗을 것이다.

소라의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아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한이수가 알려줬어."

"이수..."

그녀는 그 이름을 붙잡듯 중얼거렸다.

불타는 방 안쪽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검은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미술 선생님과 닮았지만 눈이 없었다. 빈 눈구멍에서 검은 물감이 흘렀다.

"잘 그리는 아이는 이름이 없어도 괜찮아."

여자가 말했다.

"그림만 남으면 되니까."

소라가 뒷걸음질쳤다.

서진은 그녀 앞을 막았다.

"누구야."

"평가하는 사람."

여자는 긴 붓을 들었다. 붓끝에는 검은 물감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묻어 있었다.

"이 아이는 늘 지워지고 싶어 했어. 발표할 때도, 칭찬받을 때도, 누가 그림을 보자고 할 때도. 그러니 내가 도와주는 거야."

"아니야."

소라의 목소리는 작았다.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불길 사이로 장면이 떠올랐다. 미술대회 시상식. 소라는 무대 위에서 상장을 들고 있었고, 아래에서는 누군가 수군거렸다.

"쟤 그림은 어둡기만 해."

"선생님이 밀어줬다며."

"말도 안 하는 애가 관심은 받고 싶나 봐."

어린 소라는 상장을 구기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현재의 소라가 떨었다.

"나는 그냥 그리고 싶었어."

"그래." 여자가 웃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사라지면 돼. 아무도 너를 보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상처 주지 못해."

그 말은 잔인할 만큼 달콤했다.

소라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서진은 불타는 그림 중 하나를 잡았다. 손바닥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림 속에는 소라가 그린 해온고 운동장이 있었다. 구석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박소라

"네 그림은 너 대신 남는 게 아니야."

서진은 그림을 소라에게 밀어 넣듯 건넸다.

"네가 있어서 그림이 있는 거지."

소라는 그림을 받아 들었다. 불꽃이 손끝에서 꺼졌다.

"내가 없어지면 편할 줄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근데 아무도 내 그림을 기억 못 하는 건 싫어."

검은 앞치마의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붓이 채찍처럼 날아왔다. 서진은 피하려 했지만 늦었다. 그 순간 소라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흰 종이 위에 빠르게 선이 그어졌다.

우산.

검은 우산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와 붓을 막았다. 도겸의 우산과 닮았지만, 이것은 소라가 그린 것이었다. 선은 불안정했지만 분명한 형태를 가졌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지 마!"

"싫어."

소라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내 이름은 박소라야."

방 안의 모든 그림이 동시에 빛났다. 불꽃이 꺼지고, 재가 된 줄 알았던 종이들이 벽에 다시 걸렸다. 소라의 명찰에 희미하게 글자가 돌아왔다.

박소라

완전하진 않았다. 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서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누구든 있으면 대답 좀 해!"

그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없었다.

소라가 스케치북을 품에 안았다.

"가자."

"괜찮아?"

"아직 무서워."

그녀는 젖은 눈으로 웃었다.

"근데 이제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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