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환승 연애가 안 됩니다

2화: 계약서 위의 전 남친
“마이크 빼도 돼요?”
유나는 스튜디오 복도에 나오자마자 허리춤에 달린 송신기를 더듬었다. 조금 전까지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었던 얼굴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입꼬리가 내려가자 볼 근육이 뻐근했다.
스태프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직 인터뷰가 남아서요. 잠깐만 대기실에서 쉬시면 됩니다.”
“쉬는 게 아니라 퇴근하고 싶은데요.”
“정유나 씨.”
뒤에서 현욱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유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또 표정이 망가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빨리 걸었다. 하이힐 굽이 복도 바닥을 딱딱 때렸다.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저희 오늘 처음 보는 사이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 발등을 그렇게 정확히 밟는 사람도 있나.”
“운이 좋으셨네요. 다음엔 정강이예요.”
현욱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또 5년 전과 비슷해서 유나는 더 화가 났다. 저 인간은 왜 웃는 소리까지 그대로인가. 사람은 변했다면서 쓸데없는 것만 남겨 두는 데 재주가 있었다.
대기실 문 앞에서 유나가 멈춰 섰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현욱은 그걸 보았다. 말끝에 늘 붙어 있던 여유가 한순간 사라졌다.
“물 마셔.”
그가 옆 테이블에 있던 생수병을 집어 내밀었다.
유나는 생수병과 현욱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목 탔잖아.”
“제가 목이 타는지 아닌지 대표님이 어떻게 아세요?”
“너 긴장하면 아랫입술 안쪽 씹어. 지금 피 날 것 같아서.”
유나는 입술을 뗐다. 정말 씹고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잊을 거면 제대로 잊든가. 왜 이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그런 관찰력으로 회사나 잘 보살피시죠. 예능 나올 만큼 한가하신 줄 몰랐네.”
현욱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굳었다.
“나 한가해서 나온 거 아니야.”
“아. 그러면 나처럼 돈 때문에?”
“정유나.”
“왜요. 맞잖아요. 저는 돈 때문에 나왔고 그쪽은 이미지 때문에 나왔고. 여기서 누가 누구를 비웃어요?”
현욱은 생수병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딱딱한 소리를 냈다.
“비웃은 적 없어.”
“그럼 아까 그건 뭔데. 아직도 혼자 다 막아 보겠다고 버티냐고 했죠. 그게 걱정이에요? 아니면 5년 만에 만난 전 여자친구한테 할 수 있는 제일 저렴한 안부예요?”
대기실 안 공기가 얇아졌다. 열린 문틈 너머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막내 스태프가 동시에 눈치를 보았다. 현욱은 그쪽을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싸울 거야?”
“아뇨. 저는 아주 쿨한 전 여자친구라서 싸움 같은 거 안 해요.”
유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현욱도 따라 들어오려 했다.
“들어오지 마세요.”
“PD가 같이 보자고 했어.”
“그 PD님한테 전해요. 저는 강현욱 씨랑 같은 방에 있으면 산재 신청하고 싶어진다고.”
그때 복도 끝에서 윤도윤 PD가 걸어왔다. 검은 캡 모자 아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 재미있는 그림을 발견한 사람의 눈이었다.
“두 분. 회의실로 잠깐 오시죠. 계약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습니다.”
유나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떨어졌다.
계약. 그 단어 하나에 현실이 다시 목덜미를 잡았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계약서 사본 두 부와 물컵 네 개가 놓여 있었다. 도윤 PD는 서류를 펼치며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로 말했다.
“두 분 다 본계약은 완료된 상태입니다. 정유나 씨는 오늘 촬영 시작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했고 강현욱 씨는 지난주에 이미 서명하셨고요.”
유나는 현욱을 보았다.
“정말 했네요.”
“그럼 가짜로 앉아 있었겠어?”
“가짜였으면 더 낫죠. 최소한 현실감은 없었을 테니까.”
도윤 PD가 펜 끝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좋습니다. 이 텐션. 다만 카메라 안에서는 조금 정제해 주세요. 저희가 원하는 건 난투극이 아니라 미련 없는 성인 남녀의 재회입니다.”
“미련 없어요.”
유나와 현욱이 동시에 말했다.
너무 동시에 나와서 더 이상했다. 도윤 PD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유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이 사람은 방금 장면까지 머릿속에서 예고편으로 자르고 있을 것이다.
“첫 주 규칙 다시 안내드리겠습니다. X의 정체는 직접 밝힐 수 없습니다. 질문을 받아도 구체적인 실명이나 관계 증거를 말하시면 안 됩니다. 헤어진 이유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마세요.”
유나가 팔짱을 꼈다.
“그럼 뭘 말하라는 건데요?”
“감정이요.”
도윤 PD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정확한 사실 말고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지금은 어디까지 정리됐는지. 새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됐는지.”
현욱이 건조하게 물었다.
“사실을 빼고 감정만 남기면 왜곡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대표님은 그래서 나오신 거 아닙니까. 왜곡 가능성을 감수하고도 얻을 게 있으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유나는 처음으로 도윤 PD가 현욱을 보는 눈을 보았다. 단순히 출연자를 다루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협상 테이블에서 한 번은 맞붙어 본 사람처럼 정확했다.
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나는 그 침묵이 더 신경 쓰였다. 웨이브온 대표. 스타트업. 회사 홍보. 소희가 했던 말들이 뒤늦게 이어졌다. 정말 홍보 때문일까. 아니면 홍보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걸까.
알 필요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저 하차하면 어떻게 돼요?”
유나가 물었다.
도윤 PD는 기다렸다는 듯 서류 한쪽을 돌려 보여 주었다.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위약금. 촬영 중단 손해배상. 비밀 유지 위반 조항.
유나의 속이 차갑게 식었다.
지난달 자재비와 대출 이자, 아직 입금되지 않은 외주비가 머릿속에서 줄줄이 떠올랐다. 여기에 위약금까지 얹히면 끝이었다.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농담이었어요.”
“농담으로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윤 PD가 서류를 덮었다.
“저희도 두 분을 망가뜨리려고 부른 건 아닙니다. 다만 좋은 그림은 놓치지 않을 겁니다. 서로에게 예의는 지키시고 감정은 숨기지 마세요. 이 프로그램은 그 사이에서 굴러갑니다.”
유나는 웃었다.
“참 친절한 덫이네요.”
“예능은 대체로 그렇습니다.”
현욱이 유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유나는 그 말이 싫었다. 걱정처럼 들리면서도 결정권을 빼앗는 말이었다. 5년 전에도 그는 그런 식이었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문을 닫았다.
“할 거예요.”
유나가 똑바로 말했다.
“누구 덕분에 포기하는 사람 되긴 싫거든요.”
현욱의 턱이 굳었다. 도윤 PD는 둘 사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스태프를 불렀다.
“개인 인터뷰 준비합시다.”
인터뷰룸은 생각보다 작았다. 검은 커튼, 낮은 조명, 정면 카메라. 유나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무릎 위에 얹었다. 손톱 끝이 차가웠다.
“강현욱 씨를 다시 만난 기분이 어떠세요?”
작가의 질문이 날아왔다.
유나는 잠시 천장을 보았다. 대답을 고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신기했어요.”
“신기하다?”
“네. 세상 좁다 싶고. 예전엔 가까웠던 사람인데 지금은 서로 일 얘기나 날씨 얘기도 어색한 사람이 됐다는 게.”
“미련은 없으세요?”
유나는 웃었다. 방금 배운 쿨한 성인 남녀의 표정이었다.
“미련이 남았으면 여기 못 나왔겠죠.”
거짓말이 입 안에서 너무 매끄럽게 굴러 나와서 오히려 아팠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새 사랑을 찾을 준비는 되셨나요?”
유나는 카메라 렌즈를 보았다. 검은 유리 안에 자기 얼굴이 작게 비쳤다. 피곤한 눈, 잘 칠해진 립스틱, 무너질 수 없는 사람처럼 굳은 어깨.
“준비됐어요. 적어도 똑같은 실수는 안 하려고요.”
같은 시간 다른 인터뷰룸에서 현욱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정유나 씨를 다시 만난 기분이 어떠셨나요?”
현욱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 지내 보여서 다행이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보였나요?”
작가가 되물었다. 현욱은 물컵을 들어 올리다 말고 내려놓았다.
“아니요.”
짧은 대답이었다.
“긴장하면 입술을 씹는 버릇이 아직 있더군요. 손이 떨릴 때도 손등을 아래로 숨깁니다. 잘 지내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몸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잘 아시는군요.”
현욱의 눈빛이 식었다.
“오래 만났으니까요. 지금은 끝난 관계입니다.”
그는 끝났다는 말을 너무 정확하게 발음했다. 마치 틀리면 안 되는 보고서를 읽는 사람처럼.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세요?”
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메라가 그 침묵을 오래 찍었다.
공동 촬영 세트에는 다시 부드러운 조명이 켜졌다. 유나와 현욱은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금까지 서로를 찌르던 사람들 같지 않게 둘 다 단정했다.
도윤 PD의 목소리가 모니터 뒤에서 들렸다.
“두 분은 이제 정말 새 사랑을 찾을 준비가 되셨나요?”
유나는 먼저 웃었다.
“그럼요. 저는 배울 만큼 배웠거든요. 말 안 하는 사람과는 다시 시작하지 않는 법.”
현욱의 눈썹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저도 준비됐습니다.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스태프 몇 명이 숨을 삼켰다. 유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을 움직였다. 현욱은 이번엔 먼저 다리를 뒤로 뺐다.
“피하시네요?”
“학습 능력은 있어.”
“늦게 생기셨네.”
도윤 PD가 끼어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서로에게 응원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응원. 유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하지만 카메라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이 판에서는 웃음도 자산이고 침묵도 빚이었다.
유나는 현욱을 보았다.
“좋은 분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도 좀 하시고요.”
현욱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정유나 씨도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랍니다. 혼자 버티는 걸 강한 거라고 착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서로의 말이 정확히 심장 옆을 스쳤다. 유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현욱도 웃었다. 화면만 보면 정말 정리된 사람들 같을 것이다.
“컷. 좋습니다.”
도윤 PD가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다 정리가 너무 잘되셨네요. 오히려 이상할 만큼.”
그 말에 유나의 미소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현욱도 같은 순간 시선을 내렸다. 제작진은 그 찰나까지 놓치지 않고 모니터에 표시했다.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유나는 바로 일어섰다. 현욱도 따라 일어났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하는 틈에 유나가 낮게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내 사정 아는 척하지 마.”
“그럼 너도 내 회사 얘기 꺼내지 마.”
“찔리긴 하나 봐요.”
“너야말로.”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너무 잘 찌르고 너무 잘 찔렸다. 그 사실이 더 짜증 났다.
스태프가 다가와 다음 일정표를 건넸다.
“다음 촬영은 하우스 입소입니다. 출연자분들 전원이 처음 만나는 설정이라 서로 너무 아는 티만 안 내주시면 돼요.”
유나는 일정표를 받아 들었다. 서울 근교의 단독주택 주소, 입소 시간, 개인 짐 제한, 비밀 문자실 안내. 글자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설정.
현욱과 처음 만나는 척이라니. 세상에는 사람을 웃기게 만드는 벌도 있었다.
유나가 대기실 쪽으로 돌아서는데 현욱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진동했다. 화면이 잠깐 켜졌다.
웨이브온 시리즈B 관련 긴급 미팅 요청
유나는 읽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읽어 버렸다. 현욱이 빠르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봤어?”
“뭘요. 저희 처음 보는 사이라면서요.”
유나는 일정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최대한 가볍게 웃었다.
“하우스에서 봬요. 강현욱 씨.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현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나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연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