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환승 연애가 안 됩니다

3화: 처음 보는 척의 기술
다사까 하우스의 현관문은 유난히 컸다.
유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쥔 채 문 앞에 섰다. 서울 근교의 조용한 주택가와 달리 집 안에서는 사람 목소리와 카메라 바퀴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큰 창과 낮은 소파, 제각각 놓인 화병까지 모두 누군가의 연애가 시작되기 좋게 꾸며져 있었다.
예쁜 집이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정유나 씨 맞으시죠? 짐은 이쪽에 두시면 돼요.”
한소희가 현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유나는 곧바로 표정을 고쳤다.
“집이 너무 예쁘네요. 제가 일하러 온 줄 알았어요.”
“직업병은 잠깐 내려놓고 오셨죠?”
“최대한요. 그런데 저 조명은 바꾸고 싶네요.”
소희가 웃는 사이 유나는 거실을 훑었다.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먼저 와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건 검은 앞치마를 두른 남자였다.
“미태준입니다. 요리하는 사람이고요. 배고프면 저한테 오세요.”
“정유나예요. 배고프면 일단 냉장고부터 열어 보는 사람이고요.”
“그럼 오늘 잘 맞겠네요.”
태준의 웃음은 지나치게 편했다. 유나는 그 편안함이 싫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이렇게 가벼울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서지아요. 촬영 끝나고 밥 잘 먹는 사람이 제일 좋아요.”
“좋아요. 저는 밥 먹을 땐 말이 줄어들어요.”
“그건 좀 아쉽다.”
다들 자연스럽게 웃었다. 유나는 소파 끝에 앉았다. 현관과 거실과 주방에 놓인 카메라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사각지대가 거의 없었다.
소희가 출연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오늘부터 하우스 생활 시작입니다. 첫 주 동안은 X의 정체를 직접 밝힐 수 없고요. 매일 밤 익명 문자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데이트는 내일 공지할게요.”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보다 먼저 현관 쪽을 봤다.
왜 아직 안 오지.
생각한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는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당연히 시선을 보냈다. 혼자만 안 보면 그게 더 이상했다.
강현욱이 문턱을 넘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캐리어. 회사 미팅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이었다. 그는 잠깐 거실을 둘러보다가 유나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사람을 처음 본 것처럼 정확히 한 박자 뒤에 미소가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강현욱입니다.”
유나도 따라 일어났다.
“정유나예요. 잘 부탁드려요.”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 정도까지 하면 오히려 과할 것 같았다.
태준이 현욱의 캐리어를 받아 주려다 말고 웃었다.
“여기 앉으세요. 유나 씨 옆 비었어요.”
유나의 어깨가 굳었다. 현욱은 아무렇지 않게 빈자리를 보았다. 그가 소파로 다가오는 동안 유나는 무릎 위 손을 꼭 잡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기—”
현욱이 말을 멈췄다. 소파 옆 테이블에 놓인 자몽에이드 병을 본 탓이었다. 그는 아주 짧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드시면 안—”
유나가 병을 먼저 집어 들었다.
“왜요? 처음 보는 사람이 제 음료까지 고르나 봐요.”
거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현욱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신맛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아서요.”
“관찰력 좋으시네요.”
유나는 병뚜껑을 닫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자몽 알레르기 때문이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아가 현욱 옆에 앉으며 물었다.
“대표님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회사 하세요?”
“웨이브온이라는 서비스를 운영합니다.”
“대표님이 이런 데도 나오시는구나.”
“오늘부터는 그냥 현욱 씨로 불러 주세요.”
현욱은 지아에게 미소를 보였다. 유나는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인 척하자고 마음먹은 사람이 대표님이라는 호칭에는 왜 저렇게 자연스럽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윤 PD가 모니터 뒤에서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만들게요. 두 분씩 짝을 지어서 메뉴를 정해 주세요.”
태준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유나 씨랑 해도 돼요? 공간 일하는 분이면 플레이팅도 잘하실 것 같아서.”
“저는 먹기 전에 예쁘면 더 맛있다고 생각해서요.”
유나가 대답하자 태준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 짧은 소리에 현욱의 표정이 굳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럼 저는 지아 씨랑 하죠.”
유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저렇게 빨리 정하는데.
속으로 튀어나온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태준에게 앞치마 끈을 건넸다.
“이쪽 주방이 더 넓어 보여요. 가시죠.”
주방은 생각보다 좁았다. 촬영 스태프와 출연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동선이 금세 엉켰다. 유나는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했다.
태준이 옆에서 물었다.
“못 드시는 거 있어요?”
“자몽이요. 그 외엔 없어요.”
“아까 현욱 씨가 그걸 막으려던데요.”
유나의 손이 멈췄다.
“그냥 감이 좋으신 분인가 봐요.”
“처음 만난 사람 치고는요?”
태준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유나는 웃지 못했다. 대신 수납장 맨 위에 있는 접시를 꺼내려 발끝을 세웠다.
“제가 할게요.”
“위험한데요.”
“이 정도는—”
손끝이 접시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 의자가 미끄러졌다. 유나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누군가가 팔꿈치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정유나.”
현욱의 목소리였다.
유나는 균형을 되찾고 바로 팔을 뺐다. 태준도 뒤늦게 다가와 의자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네. 의자가 말을 안 듣네요.”
현욱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꺼내 조리대에 놓았다. 그가 손을 거두려는데 유나가 낮게 말했다.
“도와준 척하지 마요.”
“넘어지는 척도 하지 마.”
“누가 넘어진 척을 해요?”
“알아. 척 아니었어.”
그 짧은 말에 유나는 더 화가 났다. 예전에도 그는 자기가 아는 유나를 먼저 꺼냈다. 그러고는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태준이 분위기를 모르고 토마토를 내밀었다.
“둘이 말싸움 잘하시네요. 원래 아는 사이예요?”
“아니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이번에는 지아가 웃었다.
“처음 본 사람끼리 호흡이 너무 좋은데?”
유나는 칼을 집어 들었다. 토마토를 반으로 가르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현욱은 그녀가 손가락을 다칠까 봐 한 번 보다가 지아 쪽으로 돌아섰다.
“맵지 않은 걸로 하죠. 같이 먹는 사람이 많으니까.”
유나는 칼날을 멈췄다. 맵지 않은 건 자신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저 매운 것도 잘 먹어요.”
현욱이 유나 쪽을 보았다.
“알아. 그런데 오늘은 속 비었잖아.”
말이 떨어진 뒤에야 그가 입을 다물었다.
태준의 손이 토마토 위에서 멈췄다. 유나는 현욱을 똑바로 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대표님은 사람 속도 보이나 봐요.”
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양파를 집었다.
“그럼 맵지 않게 해요. 저는 매운 거 못 먹거든요.”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얼굴을 만들었다. 카메라가 있는 주방에서는 그 정도 얼굴 하나쯤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저녁 식탁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태준은 유나가 접시에 허브를 올리는 걸 보고 감탄했고 지아는 현욱에게 사업 이야기를 물었다.
유나는 대답 사이사이에 웃었다. 현욱도 웃었다.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만 둘은 완벽하게 낯선 사람이었다.
“유나 씨는 연애할 때도 공간부터 봐요?”
태준이 물었다.
“공간은 거짓말을 덜 하잖아요. 사람은 너무 잘 꾸며서 문제고.”
“저는 사람이 더 쉬운데.”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와요?”
“일단 지금은 유나 씨가 웃어 주는 데서요.”
태준이 가볍게 말하자 유나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가 났다.
현욱이었다.
“대표님은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이에요?”
지아가 묻자 현욱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말을 미루지 않는 편입니다.”
유나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말하지 않아서 끝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뻔뻔했다.
현욱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말끝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소희가 다시 들어왔다.
“익명 문자는 밤 열한 시에 발송됩니다. 오늘은 누가 나를 궁금해했는지 생각하면서 쉬세요.”
사람들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유나는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라도 하면 생각이 정리될 것 같았다.
그런데 싱크대 앞에 서자 현욱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말을 미루지 않는 편입니다.
유나는 접시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저 인간이 달라졌다는 증거를 자기가 왜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옥상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는 접시를 내려놓고 계단을 올랐다. 숨을 쉴 만한 곳이 필요했다.
테라스에는 현욱이 먼저 서 있었다. 난간 너머로 어두운 마당을 내려다보던 그가 유나를 보자 셔츠 소매를 내렸다.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네가 먼저 올라온 거잖아.”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몰랐네요.”
현욱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바람에 팔을 문질렀다. 실내와 달리 밤공기가 차가웠다.
현욱이 자기 셔츠를 벗으려다 멈췄다.
“추우면 들어가.”
“명령이에요?”
“걱정이야.”
유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웃음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런 말은 잘하시네요. 정작 설명은 하나도 안 하고.”
현욱의 시선이 굳었다.
“여기서 그 얘기 하지 말자.”
“왜요. 카메라 없잖아요.”
“카메라 없어도 할 말은 아니야.”
“그럼 언제 할 건데요? 또 알아서 정리하고 사라질 때?”
현욱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유나야.”
그 호칭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늦게 들렸다. 화가 난 목소리도 아니고 계산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5년 전 비 오는 날에도 듣던 목소리였다.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그 두 글자에 아직도 반응한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었다.
테라스 문이 다시 열렸다.
“현욱 씨, 여기 계셨어요?”
지아의 목소리였다. 현욱이 고개를 돌렸다가 무심코 말했다.
“응. 유나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이름 뒤에 붙으려던 두 글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나는 들었다. 자신만 들었던 호칭의 첫 음절을.
현욱도 유나의 표정이 굳는 걸 보았다.
지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었다.
“유나 씨도 여기 있었네요. 두 분 이야기 중이었어요?”
유나는 가장 먼저 웃었다.
“아뇨. 처음 보는 사이끼리 날씨 얘기 중이었어요.”
현욱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때 거실 쪽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연달아 울렸다. 열한 시였다.
유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위에 익명 문자가 떠 있었다.
오늘 가장 궁금했던 사람은 당신이에요.
짧은 한 줄이었다.
유나는 현욱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시선은 이미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으로 가 있었다.
그도 문자를 읽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마음을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처음 보는 척하는 사람의 마음을 기다리는 일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