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환승 연애가 안 됩니다

시놉시스
대학 시절 최악의 이별을 맞이했던 정유나와 강현욱. 5년 뒤, 거액의 출연료와 각자의 절박한 사정 때문에 초인기 연애 리얼리티 예능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 모르는 척, 미련 없는 척 연기하려 했건만 눈만 마주치면 불꽃이 튀는데... 환승하고 싶어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재회 로맨틱 코미디.
1화: 너를 다시 만난 날
“미쳤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유나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쏟을 뻔했다. 강남 한복판, 세련된 카페 안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쏠렸지만 유나는 사과할 여유조차 없었다.
-유나야, 진정해. 이건 그냥 기회야. 일생일대의 기회.
“기회 같은 소리 하네. 내가 그 인간이랑 같이 예능을 찍으라고? 차라리 한강 가서 오리배랑 소개팅을 하고 말지!”
유나의 절친이자 프리랜서 매니지먼트 에이전시 팀장인 소희는 끈질겼다.
-출연료가 얼만지 들어보고 말해. 회당 1,500이야. 너 지금 대출 이자 밀린 거랑, 지난달 공간 브랜딩 프로젝트 자재비 아직 못 막은 거 내가 다 알고 있어.
1,500. 그 숫자가 유나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회당 1,500이면 한 달이면 6,000. 세 달이면... 밀린 외주비와 대출 이자를 정리하고, 보증금 걱정 없이 작은 스튜디오를 열어볼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유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응시했다. 화려한 강남 거리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 틈에서 유나는 5년 전, 가장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인간도... 한대?”
-강현욱? 당연하지. 그쪽은 이미 사인했대. 아니, 걔 웨이브온 대표라며? 스타트업 대표면 돈도 잘 벌 텐데 왜 한대?
“...회사 홍보라도 하려나 보지.”
유나는 낮게 읊조렸다. 강현욱. 이름만 들어도 가슴 언저리가 홧홧해지는 남자. 대학 시절 내내 ‘공식 커플’로 불리며 세상 모든 달콤함을 다 나눠 가졌던 사람. 그리고 졸업식 날,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이별을 통보했던 개자식.
“절대 아는 척 안 할 거야. 죽어도.”
일주일 뒤, 상암동의 한 대형 스튜디오.
유나는 잔뜩 긴장한 채 대기실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조명 효과를 불어넣고 있었지만, 유나의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정유나 씨, 이제 입장이십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유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예능 프로그램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의 사전 촬영. 제작진은 출연자들의 리얼한 반응을 담기 위해, 누가 먼저 와 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물론 유나는 적어도 한 명은 알고 있었지만.
스튜디오 중앙에는 세련되게 꾸며진 바(Bar) 형태의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 단정한 셔츠 핏, 그리고 살짝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유나는 심호흡을 하며 하이힐 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남자는 귀신같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 정유나.”
5년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턱선, 그리고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그 무심한 눈빛. 강현욱이었다.
유나는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리 거울을 보며 수백 번 연습했던 ‘쿨한 전 여친’의 미소였다.
“어머, 강현욱 씨?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씨?”
현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유나의 가식적인 미소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모르는 사람 취급하기로 했나 보지? 제작진 앞이라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구면이긴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오랜만이니까요.”
유나는 보란 듯이 현욱의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은근히 풍겨오는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예전과 똑같은 향. 그게 더 짜증 났다.
현욱은 유나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아직 본 촬영 콜이 떨어지기 전,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유나. 너 화장 진해졌다.”
“칭찬으로 들을게. 너도 성격 나빠진 건 여전해 보이고.”
“너 돈 때문에 나왔지? 아직도 혼자 다 막아 보겠다고 버티냐?”
순간 유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자식은 변한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속 긁는 데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쪽이야말로 투자금이라도 말아먹었나 보죠? 웨이브온 대표님이 이런 데 얼굴 팔러 나온 거 보면.”
“난 그냥... 궁금해서 나왔어. 네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처럼 아직 거기서 못 나왔는지.”
현욱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유나는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본 촬영 들어갑니다! 자, 두 분 자연스럽게 대화 나눠주세요!”
감독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조명이 터졌다. 유나는 즉시 카메라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와, 정말 기대되네요! 새로운 분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 설레요.”
“...나도 기대되네. 우리가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현욱의 뼈 있는 말에 유나는 그의 발등을 하이힐 끝으로 꽉 밟았다.
“억...!”
현욱의 신음이 작게 새어 나왔지만, 유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었다.
이건 전쟁이다. 5년 전의 사랑 같은 건 개나 줘버려. 지금 유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였다. 이 예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출연료를 챙기는 것, 밀린 돈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저 재수 없는 강현욱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이는 것.
하지만 유나는 알지 못했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눈동자가, 현욱을 향할 때마다 얼마나 애틋하게 흔들리고 있는지. 그리고 현욱이 밟힌 발의 고통보다, 다시 만난 그녀의 향기에 얼마나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지.
환승 연애?
아니, 이들에게는 유턴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혹한 재회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