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오컬트 요괴 탐정

2화: 백여우의 흔적
테헤란로의 새벽은 죽은 사람에게도 눈부셨다.
강남대로를 가득 채운 차량의 후미등이 초고층 빌딩 유리 외벽에 붉게 번졌다. 한도진은 검은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헬리패드 위로 올라섰다. 지상에서 마흔두 층 떨어진 옥상에는 세정제 냄새와 찬 바람만 남아 있었다.
“공식 사인 급성 마력성 심장마비. 외상 없음. 추락 흔적 없음. CCTV 이상 없음.”
서아린이 얇은 파일을 넘기며 낮게 말했다.
“너무 깨끗하군.”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옥상 출입문 옆에는 빌딩 보안팀장 박태석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도진의 낡은 탐정 면허증과 아린의 특수본 비공개 신분패를 번갈아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정식 공문 없이 현장 재검증은 곤란합니다. 경찰도 왔다 갔고 보험 조사관도 다녀갔습니다. 저희는 절차대로 협조했습니다.”
아린의 눈동자 안쪽에서 금빛이 아주 얇게 번졌다.
“절차대로 했는데 사람이 옥상에서 심장만 비어 죽었군요.”
박태석의 입술이 굳었다.
도진은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헬리패드 중앙으로 걸어갔다. 바닥은 물청소를 끝낸 듯 반들거렸다. 그러나 세정제 밑으로 늙은 쇠와 탄 살갗이 섞인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일반인은 불쾌한 악취로만 느꼈겠지만 도진에게는 식지 않은 범행의 온도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피해자 차문규의 손목시계를 꺼냈다. 유리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검붉게 굳어 있었다.
“차문규 명우그룹 재무 이사. 숨진 뒤에도 비싼 시계는 살아남았군.”
“유족이 인계를 거부했어요. 불길하다고요.”
“쓸모 있는 판단이야.”
도진은 시계를 헬리패드 바닥에 눕혔다. 손끝이 혈흔에 닿는 순간 시야 안쪽에서 푸른 격자선이 번졌다. 바닥과 난간과 옥상 기계실이 투명한 좌표로 쪼개졌다. 바람의 방향과 마기 잔류 농도와 세정제의 증발 흔적이 동시에 떠올랐다.
[오컬트 루미놀 반응 A 가동.]
[잔류 마기 입자 11.8% 검출.]
[표면 은폐 술식 확인. 세정제와 저온 소각 주술 혼합.]
헬리패드 위로 붉은 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처음에는 먼지처럼 흩어져 보였지만 곧 얇은 선을 이루었다. 선은 중앙에서 시작해 난간 쪽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난간 앞 80센티미터 지점에서 갑자기 끊겼다.
도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피해자는 여기서 걸어간 게 아니야.”
아린이 곁에 섰다.
“끌려갔나요?”
“심장 코어가 먼저 뽑혔다. 몸은 그 뒤에 난간 쪽으로 옮겨졌고.”
박태석이 창백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런 말씀은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차 이사님은 지병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도진은 난간 아래 고정 볼트에 손끝을 댔다. 볼트 홈 안쪽에서 붉은 마기가 실처럼 말려 나왔다. 여우털처럼 가늘고 뜨거운 기운이었다.
“지병이 난간 볼트에 꼬리를 문지르지는 않지.”
박태석은 더 말하지 못했다.
붉은 실이 허공에서 진동했다. 도진은 손목시계를 다시 움켜쥐었다. 혈흔의 기억과 현장의 좌표가 맞물리자 범행 순간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떠올랐다.
차문규가 술 냄새를 풍기며 뒷걸음질쳤다. 그의 앞에는 흰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마기 노이즈에 가려졌지만 입술만은 선명했다. 비웃음이 묻은 붉은 입술이었다.
이사님. 이제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네가 뭘 가져갔는지 알아? 그건 회사 돈이 아니야. 사람 목숨이 걸린 장부라고!
여자의 손가락 끝에서 은빛 바늘이 튀어나왔다. 바늘은 차문규의 갈비뼈 사이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비명은 바람에 찢겼고 가슴 안쪽의 붉은 핵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여자는 그 핵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향을 맡듯 고개를 숙였다.
[프로파일링 시뮬레이션 P 동기화.]
[공격 각도 31도. 피의자 추정 신장 169에서 172센티미터.]
[마기 계열: 호족 백여우 분파.]
아린의 손이 검집 위로 내려갔다.
“백여우가 맞네요.”
“맞는데 너무 친절해.”
도진은 시뮬레이션 속 붉은 궤적을 확대했다. 여자의 등 뒤에서 꼬리 하나가 떨어져 나와 불꽃처럼 탔다. 그 마기 조각은 옥상 아래로 미끄러져 테헤란로 남쪽 골목을 향했다. 도진이 유품에서 보았던 클럽 헤븐 방면이었다.
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탈출 경로 아닌가요?”
“탈출 경로처럼 보이라고 만든 것. 꼬리 하나를 태워서 흘린 가짜 길이다. 현장팀이 여길 대충 훑었다면 그쪽으로 달려갔겠지.”
아린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특수본 선발대가 실제로 클럽 주변을 뒤졌어요. 성과 없음으로 종결됐고요.”
“성과가 없도록 설계된 흔적을 밟았으니까.”
도진은 난간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궤적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 난간 바깥에 붉은 입자 몇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강한 바람 속에서도 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계단을 밟고 맞은편 빌딩으로 건너간 흔적 같았다.
아린이 난간 너머를 보았다. 맞은편 건물 27층 사무실 몇 칸에만 희미한 야근등이 켜져 있었다.
“허공을 걸었다고요?”
“유리 반사면을 발판으로 쓴 거야. 환술이 아니라 물리 이동. 발목에 마찰 주술을 걸고 외벽 각도를 이용했겠지.”
도진은 바람 속으로 손을 뻗었다. 붉은 입자 하나가 손톱에 달라붙었다. 그는 그것을 작은 증거 봉투 안에 밀어 넣었다.
“클럽은 미끼고 진짜 집은 회사 안이군.”
박태석의 무전기가 잡음 섞인 소리를 냈다. 그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도진의 시선을 피했다.
“보안실로 갑시다.”
“그쪽은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도진이 돌아보았다.
“사람이 죽은 옥상에서 금지 구역을 말하는 건 늦었어.”
보안실은 옥상보다 더 답답했다. 여덟 대의 모니터가 로비와 지하 주차장과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추고 있었다. 박태석은 손을 떨며 출입 로그를 띄웠다. 회사 로고가 박힌 시스템 창에는 차문규의 카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새벽 1시 17분. 옥상 전용 엘리베이터 사용.
동행 권한 카드 1건.
아린이 화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동행자가 있네요.”
도진은 이름을 읽었다.
“백설하. 명우그룹 전략투자본부 이사.”
박태석이 급히 말했다.
“백 이사님은 참고인 조사 받으셨습니다. 차 이사님과 투자 회의가 있었고 먼저 내려가셨다고 진술했습니다. 출입 기록도 정상입니다.”
“영상은.”
“그 시간대 옥상 엘리베이터 카메라만 서버 오류로 복구 중입니다.”
도진이 웃었다.
“요괴 범죄 현장에서 제일 부지런한 직원은 언제나 서버 오류군.”
박태석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그는 회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진은 그 겁을 비난하지 않았다. 겁먹은 사람은 보통 거짓말보다 빈틈을 먼저 흘렸다.
“백업 장치.”
“이미 포렌식 팀이 봤습니다.”
“사람 포렌식이겠지.”
도진은 모니터 아래 먼지가 쌓인 백업 장치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서 잔류 전류가 튀었다. 삭제된 영상 조각들이 푸른 격자 안에서 떠올랐다. 화면은 대부분 깨져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흰 소매와 목덜미 일부는 남아 있었다.
아린이 숨을 죽였다.
“목 뒤에 반점이 있어요.”
도진은 픽셀을 확대했다. 흰 피부 아래에 여우 발톱 모양의 붉은 반점 세 개가 박혀 있었다. 자연스러운 점이 아니었다. 마기를 인간 육체 안에 묶을 때 생기는 호족 신분각이었다.
“백여우가 인간 껍질을 오래 쓰면 꼬리부터 들킨다. 그래서 목덜미나 척추에 신분각을 박아 묶어 둬.”
아린은 특수본 단말을 꺼냈다. 비공개 요괴 신분 데이터베이스가 열리고 백설하의 이름이 검색창에 입력됐다. 곧바로 평범한 프로필이 떠올랐다.
출생 정상. 학력 정상. 범죄 이력 없음. 마기 반응 음성.
아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너무 깨끗해요.”
“깨끗한 것과 지워진 것은 다르지.”
“3년 전 이전 자료가 전부 종이 문서 스캔본이에요. 원본 해시가 없어요.”
“새 인생을 샀군. 가격은 누가 냈는지 모르겠지만.”
도진은 보안실 방문자 명함 상자를 뒤졌다. 맨 아래에 고급 백색 명함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백설하. 명우그룹 전략투자본부 이사. 이름 아래 금박으로 찍힌 직함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가 명함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자 미세한 은색 가루가 떨어졌다.
[금속성 마력 촉매 검출.]
[희토류 계열 반응 미량.]
[독성 분석률 0.03%. 추가 시료 필요.]
아린이 낮게 물었다.
“독침인가요?”
“피해자 몸에 들어간 바늘과 같은 계열일 가능성이 높아. 아직은 냄새만 맡은 수준이지만.”
“마력 코어를 뽑았다면 독까지 쓸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죽이기 위한 독이 아닐 수도 있어. 사망 시간을 흐리거나 심장마비처럼 보이게 만드는 가림막. 혹은 장부를 삼키기 전에 입을 막는 용도.”
그 말에 아린이 파일을 다시 펼쳤다. 차문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결재한 문서 목록이 있었다. 전략투자본부 비공개 펀드. 해외 법인 전환. 임원 전용 장부 열람 권한.
“차 이사가 뭔가를 막으려 했네요.”
“그래서 심장만 빼간 게 아니야.”
도진은 깨진 영상 속 여자의 입술을 떠올렸다. 장부라는 말에 반응하던 차문규의 공포도 함께 떠올랐다.
“그 여우는 회사 안에서 신분만 훔친 게 아니다. 돈길과 사람 목숨이 같이 묶인 장부를 먹고 있어.”
그때 보안실 전화가 울렸다. 박태석이 수화기를 들었다가 곧바로 굳었다.
“전략투자본부 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답니다. 백 이사님 사무실 문이 잠겨 있고 안에서는 아무도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도진과 아린은 동시에 움직였다.
맞은편 빌딩 27층 전략투자본부는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유리문에는 퇴근한 직원들의 지문과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린이 손바닥을 출입문에 대자 금빛 파문이 잠금장치 사이로 스며들었다. 작은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불법 침입으로 걸리면 제가 책임집니다.”
“개인 의뢰라며.”
“그래도 팀장 명함은 아직 쓸 만해요.”
도진은 희미하게 웃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설하의 사무실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볼펜 한 자루와 닫힌 노트북 하나뿐이었다. 서랍에는 종이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벽면의 향 디퓨저에서는 달콤한 복숭아 냄새가 났다. 그 밑에 썩은 피 냄새가 얇게 숨었다.
아린이 창가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누가 있었어요. 환술 잔향이 따뜻해요.”
“도망치면서 청소까지 했군.”
도진은 책상 아래 서랍 레일을 손끝으로 훑었다. 맨 안쪽 홈에 검은 케이스 조각이 걸려 있었다. 독침을 고정하던 홈이 비어 있었다. 그는 조각을 증거 봉투에 넣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손가락만 한 보랏빛 앰풀 하나가 남아 있었다. 라벨은 없었다. 그러나 앰풀 입구에 은빛 바늘이 스친 자국이 있었다.
[미확인 독성 매개체.]
[희토류 촉매 반응 재검출.]
[정밀 분석 필요.]
아린이 숨을 삼켰다.
“미끼일까요?”
“미끼라도 성분은 남아.”
도진이 앰풀을 봉투에 넣는 순간 창가 유리에 붉은 입술 자국이 떠올랐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마기 낙인이었다. 글자는 입술 자국 아래에서 피처럼 번졌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
아린의 손끝에 금빛 살기가 맺혔다.
“도발이에요.”
“그래.”
도진은 유리창 너머 새벽의 강남을 내려다보았다. 빌딩 숲 사이로 붉은 마기 한 줄기가 아직 식지 않은 채 이어져 있었다. 백설하는 멀리 가지 않았다. 사냥감을 놀리는 포식자처럼 일부러 냄새를 남겨 두었다.
도진은 증거 봉투를 코트 안쪽에 넣었다. 그리고 허리춤의 특수 제어 권총을 확인했다.
“좋아. 이제 누가 누구를 추적하는지 알려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