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신의 선율을 그리는 작곡가3화

신의 선율을 그리는 작곡가

신의 선율을 그리는 작곡가

3화: 상처 입은 디바

오후 실기실 문을 열자 낯선 목소리가 먼저 귓가를 스쳤다.

“임하윤 아직 안 왔어요?”

백도겸 교수는 출석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자피아노와 낡은 업라이트 사이로 학생들이 둘씩 모여 있었다.

우진의 맞은편 자리만 비어 있었다.

“오늘 실기는 간단하다.”

백도겸이 출석부를 덮었다.

“작곡과는 보컬 한 명과 짝을 이뤄 여덟 마디 반주를 만든다. 보컬은 그 위에 한 소절을 얹어라. 잘 부르는지보다 상대의 호흡을 들을 줄 아는지 보겠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멎었다. 하얀 셔츠 소매 끝이 아주 가늘게 떨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여학생이 실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작은 인사였다.

그 순간 우진의 시야에 선율이 피어올랐다.

목소리는 아직 한 음도 제대로 울리지 않았는데도 공기 위로 맑은 금빛 오선지가 번졌다.

그러나 그 빛은 목 아래에서 검은 매듭에 걸려 있었다.

[미확인 보컬 파형 확인.]
[공포 반응성 뇌파 간섭률: 76%.]
[호흡 주기 불안정.]

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저 목소리는 잘 다듬어진 학생의 소리가 아니었다. 한 번만 제대로 열리면 사람들의 발을 멈추게 할 원석이었다. 그런데 금빛 파형이 숨 한 번마다 꺾여 사라졌다.

“임하윤.”

백도겸의 시선이 하윤에게 닿았다.

“강우진과 해라. 먼저 시작하지.”

실기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수석이랑 바로 붙네.”

윤태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한서린은 팔짱을 낀 채 우진과 하윤을 번갈아 봤다.

하윤의 입술이 굳었다.

“교수님. 저는 다른 날에 하면 안 될까요?”

“오늘은 한 소절뿐이다.”

“그래도…….”

하윤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붉은 점선으로 튀었다. 박자는 점점 빨라졌고 그 위에 검은 파형이 불규칙하게 덮였다.

우진은 전자피아노 의자에 앉다가 다시 일어났다.

“제가 먼저 짧게 칠게요.”

하윤이 그를 올려다봤다.

“부르고 싶지 않으면 안 불러도 됩니다. 반주만 들어 보고 결정해요.”

그 말에 하윤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그걸 당신이 정해요?”

“아니요. 그래서 결정하라고 했어요.”

실기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백도겸은 아무 말 없이 피아노 옆으로 물러났다.

하윤은 한참 동안 건반을 바라봤다. 도망치고 싶은 발끝이 문 쪽을 향했다가 천천히 멈췄다.

“한 번만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중음부에서 시작한 세 개의 음을 짧게 연결했다.

하윤은 눈을 감았다.

“아…….”

가느다란 모음 하나가 공기 위로 떠올랐다.

금빛 파형이 막 피어나는 순간 전자피아노의 자동 리듬 버튼이 옆자리 학생의 팔꿈치에 눌렸다. 딱딱한 클릭음과 함께 기계적인 드럼 소리가 한 박자 크게 튀었다.

하윤의 어깨가 움찔했다.

다음 박에서 우진이 손을 뗐다. 반주는 멈췄다.

하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귀를 막은 채 숨을 들이켰다. 들숨은 목에서 걸렸고 내쉬는 숨은 나오지 않았다.

[공포 반응성 뇌파 간섭률: 91%.]
[경고: 과호흡 징후.]

“하윤아.”

백도겸이 한 걸음 다가갔지만 하윤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그녀는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고 실기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금빛이었다가 검게 번진 파형의 잔상이 우진의 시야에 남았다.

“수업 계속한다.”

백도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봤다.

“교수님.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강우진.”

“저 학생은 점수 때문에 나간 게 아닙니다.”

우진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귀에서 소리가 사라진 날 아무도 그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노래를 못 한 학생에게 필요한 것도 다시 노래하라는 명령일 리 없었다.

백도겸은 잠시 우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분이다. 억지로 데려오지는 마라.”


복도 끝 비상계단 옆 연습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우진은 자판기에서 뽑은 미지근한 물병을 들고 문 앞에 섰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적이었다.

우진의 눈에는 얕고 거친 숨이 붉은 선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들어가도 돼요?”

대답은 없었다.

우진은 문을 더 열지 않았다. 물병을 문턱 안쪽에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물만 두고 갈게요.”

“왜 따라왔어요?”

하윤의 목소리는 벽 쪽을 향해 있었다.

“동정하려고요?”

“아니요.”

우진은 복도 바닥에 천천히 앉았다.

“실기 점수를 포기할 만큼 힘들어 보여서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괜찮다고. 한 번만 해 보자고. 그러다가 내가 망치면 또 미안해하라고 하겠죠.”

우진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골랐다.

“그럼 오늘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연습실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멈췄다.

“뭐라고요?”

“안 해도 돼요. 내가 하윤 씨 대신 교수님께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이상해 보일 텐데요.”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내가 바꿀 수 없어요. 그래도 지금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건 하윤 씨 몫이죠.”

긴 침묵이 흘렀다.

하윤이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

“당신도 이상하네요.”

“그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조금 뒤 하윤이 물병을 집는 소리가 들렸다.

“반년 전 공연에서 반주가 멈췄어요.”

우진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학교 축제였는데 기타 줄이 끊어졌거든요. 선배들이 바로 고친다고 했는데 그 몇 초가 너무 길었어요. 객석에서 누가 웃었고 누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물병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지 작은 마찰음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반주가 비는 소리만 들리면 숨이 막혀요. 악보를 봐도 다음 음이 안 보여요. 목이 잠기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고…….”

“노래가 무서운 게 아니군요.”

“뭐요?”

“아무도 채워 주지 않는 그 공백이 무서운 겁니다.”

하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진의 시야에서 검은 매듭이 아주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아는 척하지 마요.”

말은 날카로웠지만 처음의 방어와는 달랐다.

“알아들은 것뿐이에요.”

우진은 연습실 안쪽의 낡은 업라이트를 바라봤다. 건반 위에는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노래하자는 말은 안 할게요. 대신 반주 하나를 들어 볼래요?”

“그게 뭐가 달라요?”

“반주가 멈춘 뒤가 아니라 반주가 이어지는 동안 숨 쉬는 연습부터 하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안 맞으면 바로 관둘 거고요.”

하윤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멈추자고 하면요?”

“그 즉시 멈춥니다.”

“내가 다시 해 보자고 하면요?”

우진은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봤다.

“그때 다시 칩니다.”


하윤은 업라이트에서 두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우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윤의 호흡은 짧고 잔뜩 솟아 있었다.

[진정 유도 권장: 76 bpm.]
[저역 자극 최소화.]
[잔향 공백 완충 배열을 제안합니다.]

금빛 안내선이 건반 위로 번졌다. 하지만 하윤의 들숨은 아직 76bpm보다 빨랐다.

그는 박자를 조금 늦췄다.

둥.

낮은 음은 짧게 끊고 중음부의 부드러운 화음을 얹었다. 이어지는 아르페지오는 빈 틈을 가늘게 메웠다.

우진은 하윤의 들숨이 길어질 때마다 화음의 꼭대기 음을 한 칸 높였다.

“노래하지 말고 숨만 쉬어요.”

하윤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첫 네 마디가 지나갔다.

그녀의 어깨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숨이 들어오는 간격이 조금 길어졌다. 붉은 선이 덜 날카롭게 흔들렸다.

[공포 반응성 뇌파 간섭률: 76% → 68%.]

우진은 오른손을 더 가볍게 옮겼다. 건반을 세게 누르면 소리가 앞서 나갔다. 하윤이 따라가야 한다고 느끼지 않게 그의 반주는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지금 끊길 것 같아요?”

하윤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안 끊겨요.”

“어떻게 알아요?”

“내가 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말은 좀 믿어도 돼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듣고 판단해요.”

하윤은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음 하나만 해 볼게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음 화음을 열었다.

“음…….”

첫 허밍은 공기 중간에서 흔들렸다. 우진은 손가락을 한 음 위로 옮겼다.

금빛 파형 하나가 매듭 사이를 뚫고 나왔다.

[보컬 공명 가능성: 94.6%.]
[고음 배음 구조 확인.]

하윤의 음은 짧게 끝났다. 그러나 끝난 뒤에도 그녀는 귀를 막지 않았다.

“방금 내가 흔들렸죠?”

“조금요.”

“거짓말은 안 하네요.”

“다시 할 수 있겠어요?”

하윤은 바로 고개를 젓지 않았다.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내가 다시 하자고 하면 친다고 했죠.”

“그랬죠.”

“그럼 한 번 더.”

두 번째 허밍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한 박자를 넘겼다. 맑은 음이 업라이트의 낡은 현을 지나 연습실 천장까지 올라갔다. 금빛 오선지가 흔들리며 넓게 퍼졌다. 검은 매듭은 아직 목을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지만 조금 전처럼 소리를 삼키지는 못했다.

[공포 반응성 뇌파 간섭률: 52%.]
[신규 기능 조건 일부 충족: 감정 공명 패턴 기록.]

우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오래전 들리지 않던 작업실의 침묵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손끝에서 나온 몇 마디가 누군가에게 숨을 쉴 틈을 주고 있었다.

마지막 화음이 잔향으로 가라앉았다.

하윤은 눈을 뜬 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곡 이름이 뭐예요?”

우진은 건반 위에 남은 손을 내려다봤다.

“안도.”

“이미 만든 곡이에요?”

“방금 처음 만들었어요.”

하윤은 믿기 어렵다는 듯 그를 봤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작게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업을 빼먹은 건 혼낼 생각이었는데.”

문가에 선 백도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는 윤태와 한서린이 서 있었다. 윤태는 뭔가 말하려다 하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한서린은 우진의 손과 낡은 업라이트를 번갈아 보았다.

“반주가 계속 바뀌었어요.”

“맞춰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우진의 대답에 서린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백도겸은 하윤에게 물었다.

“괜찮겠니?”

하윤은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부터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숨을 한 번 확인한 뒤 대답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아요. 그래도…… 다시 해 보고 싶어요.”

“좋다.”

백도겸은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내일 오후 네 시에 녹음 부스가 빈다. 과제로 남기지 않겠다. 둘이 원하면 써라.”

하윤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녹음이요?”

우진은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녹음 부스의 유리창도 누군가에게는 무대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오늘 한 소절은 녹음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하윤에게 말했다.

“내일도 듣기만 해도 됩니다. 부르고 싶어질 때까지.”

하윤은 열쇠를 바라봤다. 도망치고 싶은 얼굴이었다. 동시에 금빛 파형의 끝에는 아주 작은 기대가 남아 있었다.

“부스에 들어가면…… 반주가 멈추지 않게 해 줄 수 있어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끝까지 칠게요.”

하윤은 손을 가슴 앞에서 꼭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그럼 내일은 한 소절보다 더 해 볼래요.”

우진의 시야에 금빛 선율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검은 매듭을 밀어내며 아주 조금 더 멀리 뻗고 있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표지소설
연재중 5%
#아카데미#판타지#음악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평생 남의 이름 뒤에 숨어 곡을 쓰다 과로사한 무명 작곡가 강하진이, 음악이 마법이 되는 판타지 아카데미의 마력 제로 낙제생 하진으로 빙의한다. 퇴학 직전 24시간 루프와 [신들의 작곡 시스템]을 이용해 지구의 화성학과 거장들의 선율을 대기 에테르 유도식으로 변환하며, 악보 한 장으로 아카데미와 제국을 뒤흔드는 천재 작곡가의 대마법 성장기.

7화2026.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