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율을 그리는 작곡가

2화: 신의 조율
“강우진. 진짜 안 일어나면 첫날부터 백도겸 교수한테 찍힌다?”
윤태의 손이 어깨를 다시 흔들었다.
우진은 책상 위에 내려놓은 조율 렌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낡은 선풍기 안에서 빨갛게 튀던 결함 노드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얇은 오선지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윤태의 목소리는 노란 실선으로 튀어 올랐다. 창밖 자동차 경적은 찢어진 보랏빛 파형으로 번졌다.
[환경음 스캔 안정화: 41%.]
[청각 과부하 방지를 위해 주요 결함 노드만 표시합니다.]
“이게 꿈이면 너무 정교한데.”
“꿈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세수부터 해. 오늘 건반 작곡 실기 있대. 교수님이 신입생들 한 명씩 다 본다더라.”
건반 작곡 실기.
그 단어가 우진의 가슴을 눌렀다. 스무 살의 그는 입학 실기에서 수석을 했다. 그러나 그 뒤의 시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곡을 쓰는 일로 채워졌다. 음표들은 남의 타이틀곡으로 팔려 나갔고 그의 귀는 그 대가로 망가졌다.
우진은 거울 앞에 섰다.
젊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닳지 않은 눈, 아직 무너지지 않은 귀, 아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손.
“다시는 넘겨주지 않아.”
낮은 목소리와 함께 심장 박동이 붉은 점선으로 번졌다. 시스템은 그 박동마저 박자 단위로 잘라 보여 주었다.
서울실용예술대학 실용음악관은 낡은 콘크리트 냄새와 새 학기 특유의 긴장으로 가득했다.
복도 끝 합주실 앞에는 작곡과 신입생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허공의 건반을 두드렸고 누군가는 악보집을 펼친 채 마지막까지 화성 진행을 외웠다.
우진이 다가서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쟤가 강우진?”
“입학 실기 수석이라며.”
“즉흥 앞에서는 다 티 나. 준비곡 잘 친 거랑은 다르지.”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유난히 선명했다. 짧은 단발에 검은 셔츠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이름표에는 한서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태가 우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한서린. 예고 때 작곡 콩쿠르 쓸었다더라. 네 얘기 나오니까 표정이 영 아니던데.”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진의 시야는 이미 합주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문틈 사이에서 거대한 검은 파형이 삐뚤어진 갈비뼈처럼 솟아 있었다. 합주실 중앙의 낡은 그랜드 피아노였다.
현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낮은 라 음은 기준보다 11센트나 처져 있었고 중음부 도는 해머 펠트가 닳아 배음이 거칠게 찢어졌다. 보통 귀에는 오래된 피아노라고 느껴질 정도였지만 우진에게는 안쪽이 붉은 균열로 가득한 기계처럼 보였다.
[진단: A3 현 장력 불균형.]
[진단: C4 해머 접촉각 3.7도 오차.]
[튜닝 권장: 기준 주파수 440Hz 회복 후 배음 정렬.]
“재밌네.”
우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문이 열리고 백도겸 교수가 들어왔다. 오십대 초반의 마른 남자였다. 그는 출석부를 교탁에 내려놓고 학생들을 훑었다.
“긴말 안 한다. 작곡과면 악보를 쓰기 전에 소리를 판단해야 한다.”
백도겸은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피아노로 여덟 마디를 즉흥으로 만든다. 주제는 ‘첫 문’. 반주든 멜로디든 상관없다. 악기가 불편하면 그 불편함까지 포함해서 곡으로 처리해라.”
학생들이 술렁였다.
누군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교수님, 피아노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는 거다.”
백도겸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좋은 스튜디오와 새 악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작곡가는 망가진 소리 앞에서도 판단해야 한다. 피할지, 눌러쓸지, 고칠지.”
우진은 교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일부러 방치한 피아노였다. 신입생들이 음정의 불안정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려는 시험.
한서린이 가장 먼저 나섰다.
그녀의 손가락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첫 화음이 울리는 순간 중음부의 배음이 거칠게 튀며 멜로디를 긁었다.
서린은 눈썹을 좁혔다. 곧 페달을 줄이고 오른손의 음역을 높게 옮겼다. 문제가 있는 중음부를 피해 가며 선율을 짧게 닫았다.
나쁘지 않았다. 악기의 상처를 피해서 자기 곡을 지킨 영리한 연주였다.
학생 몇 명이 박수를 쳤다.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진 쪽을 봤다.
“수석은 이런 악기에서도 다르게 들리겠죠?”
합주실 안의 시선이 우진에게 꽂혔다.
윤태가 작게 숨을 삼켰다.
우진은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는 대신 뚜껑을 열었다.
“연주 전에 잠깐만 손봐도 됩니까?”
백도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율을 하겠다고?”
“완전 조율은 아닙니다. 곡이 망가지지 않을 만큼만 맞추겠습니다.”
뒤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첫날부터 피아노 조율사야?”
“실기 수석 맞아?”
우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피아노 안쪽의 붉은 결함 노드가 시야에 또렷했다. 제대로 된 조율 해머는 없었다. 대신 합주실 벽 선반에 놓인 정비 키트와 얇은 펠트 조각 몇 개가 보였다.
“3분.”
백도겸이 말했다.
“3분 안에 끝내고 바로 연주해라. 실패하면 그 실패도 네 점수다.”
우진은 정비 키트에서 작은 렌치와 펠트 핀셋을 꺼냈다.
현 하나를 건드리자 낮게 울린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시스템이 즉시 반응했다.
[A3 기준 편차: -11.4 cent.]
[권장 장력 보정: 시계 방향 2.1도.]
딸깍.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옆에 선 학생들의 눈에는 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시야에서는 붉은 균열 하나가 주황색으로 옅어졌다.
그는 다음 현으로 넘어갔다.
C4 해머의 닳은 면에는 펠트 조각을 얇게 덧댔다. 오른손으로 현을 눌러 잔향을 죽이고 왼손으로 핀을 돌렸다. 손목이 기억하고 있었다. 회귀 전 수많은 녹음실에서 싸구려 업라이트와 망가진 마스터 키보드를 살리며 몸에 새긴 감각이었다.
다만 지금은 귀가 들렸다.
아니, 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소리가 보였다.
[배음 정렬률: 32%.]
[배음 정렬률: 54%.]
[배음 정렬률: 79%.]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점점 조용해졌다. 우진이 현을 건드릴 때마다 피아노의 울림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흐릿하고 눅눅하던 소리가 조금씩 중심을 잡고 있었다.
한서린의 표정에서도 비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팔짱을 푼 채 우진의 손목 각도를 보고 있었다.
“저거…… 진짜 맞는 소리가 나는데?”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백도겸은 팔짱을 낀 채 눈을 떼지 않았다.
“시간.”
교수의 말이 떨어졌을 때 우진은 마지막으로 저음 현을 퉁겼다.
둥.
낡은 합주실의 창문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울림이 길게 남았다가 공기 속에서 둥근 금빛 원으로 닫혔다.
[임시 조율 완료.]
[배음 공명률: 91.8%.]
[청중 감정 동기화 가능.]
우진은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과거의 노이즈가 지나갔다. 이름을 빼앗긴 곡들, 잠긴 작업실, 들리지 않는 귀, 타인의 이름으로 팔려 나가던 후렴.
삐이이이.
기억 속 이명이 얇게 고개를 들었다.
우진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눈앞의 건반 위로 금빛 안내선이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안내선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시스템은 길을 보여 줄 뿐이었다.
문을 여는 것은 자신의 손이어야 했다.
첫 음은 낮은 라였다.
방금 살려 낸 현이 깊게 울렸다. 어둡고 좁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음이었다. 이어지는 세 음은 망설임처럼 낮게 내려앉았다가 오른손의 선율을 타고 위로 솟았다.
주제는 첫 문.
우진은 문을 여는 사람의 심장을 썼다.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도망치고 싶은 숨. 결국 밀어붙이는 선택. 그리고 문틈으로 쏟아지는 빛.
피아노 위에 금빛 오선지가 펼쳐졌다.
[청중 평균 심박: 82.]
[동기화율: 28%.]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바닥을 만들자 오른손 선율이 더 선명해졌다. 피아노의 배음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겹쳐졌다. 낡은 현들은 새 악기처럼 빛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래 버틴 목소리처럼 깊은 색을 냈다.
학생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서린은 완전히 몸을 돌렸다. 윤태는 입을 반쯤 벌렸다. 백도겸은 화성 진행을 따라가듯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들고 있던 펜을 멈췄다.
[동기화율: 47%.]
[동기화율: 63%.]
[동기화율: 81%.]
마지막 네 마디에서 우진은 페달을 깊게 밟았다.
저음부가 한 번 크게 열렸다. 그 위로 고음부의 맑은 선율이 가로질렀다. 합주실의 형광등 소음마저 선율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지막 음.
가장 높은 미가 떨림 없이 길게 뻗었다.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일어난 것은 백도겸이었다.
짝. 짝. 짝.
교수의 박수 소리가 합주실을 깨웠다.
곧 윤태가 벌떡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는 빠르게 커졌다.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피아노 안쪽을 들여다봤고 누군가는 우진의 손을 바라봤다.
한서린만은 박수를 늦게 쳤다. 대신 그녀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곡, 미리 써 온 거예요?”
우진은 피아노 뚜껑을 천천히 내렸다.
“방금 썼어.”
합주실이 다시 술렁였다.
백도겸은 웃지 않았다. 그는 우진을 오래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강우진. 수업 끝나고 남아라.”
질책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 흔들렸다.
그러나 우진은 교수의 눈빛에서 흥분을 읽었다. 노련한 음악가가 희귀한 소리를 발견했을 때 숨기지 못하는 떨림이었다.
백도겸은 출석부를 덮었다.
“다음 시간은 보컬과 합동 실기다. 오늘 연주한 학생들은 보컬 한 명과 짝을 이뤄 즉석 반주를 만든다.”
교수의 시선이 우진에게 멈췄다.
“강우진, 너는 따로 배정하겠다.”
“누구와 합니까?”
“임하윤.”
그 이름이 떨어지는 순간 우진의 시야 한쪽에 이상한 파형이 스쳤다.
문밖 복도 어딘가에서 아주 얇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끊어지는 진동. 금빛이 될 수 있었던 선율이 검은 매듭에 묶여 있었다.
[미확인 보컬 파형 감지.]
[공포 반응성 뇌파 간섭률: 73%.]
우진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