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의 일기장

9화. 도망자가 된 형사
2026년의 경찰청. 은호는 명패에 새겨진 아버지의 기일을 보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8월 14일'에서 '6월 15일'로 실시간으로 바뀌는 기적 같은 재앙. 은호가 던진 미래의 경고가 박민석에게 '즉각적인 살해 동기'를 부여했고, 그 결과 아버지는 2006년 6월 15일 밤에 죽게 된다.
"강 형사, 잠깐 청문감사관실로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그때, 은호의 자리에 낯선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감사관실 소속 형사들이었다. 그들은 은호가 수사 기밀을 외부로 유출하고, 특정 민간인을 협박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며 그의 노트북과 휴대폰을 압수하기 시작했다. 정점에 선 자, 국과수 실장 박민석이 놓은 정교한 덫이었다.
"강 형사님,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한세아가 감사관들의 눈을 피해 은호를 비상구 계단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차 키가 들려 있었다.
"형사님에 대한 긴급 체포 명령이 내려졌어요. 결재 라인이 너무 빨라요. 박 실장님이 직접 움직이고 계신 것 같아요. 일단 피하세요!"
세아의 눈에는 공포와 결연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은호는 그녀의 도움으로 지하 주차장을 통해 경찰청을 빠져나갔다. 그는 이제 법망을 수호하던 형사에서, 시스템에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다.
은호는 성북구 외곽의 낡은 모텔 방에 숨어들었다. 그는 다급히 가방 속에서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던, 낡고 해진 '비밀 수사 노트'를 꺼냈다. 정식 수사 일지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아버지만의 집요한 추적이 담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2006년 6월 15일. 임기태의 사고 차량이 정릉동 일대의 무허가 폐차장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첩보가 있다. 특히 정릉천 끝자락의 '대성폐차장'은 박민석의 친척 명의로 되어 있다. 녀석이 실험실에서 빼돌린 시약들을 그곳에서 처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 퇴근길에 직접 확인해볼 생각이다.]
아버지는 이미 정답을 쥐고 있었다. 은호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일생일대의 도박을 시작했다. 과거의 박민석을 기만하여 아버지를 구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에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박민석. 네가 지금 경찰서 정문 근처 골목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안다. 하지만 헛수고야. 아버지는 이미 30분 전에 네 비밀 아지트인 정릉동 폐차장으로 향하셨거든.]
은호의 문장이 일기장에 새겨지자마자, 종이 위로 잉크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칠게 튀어 오른 검은 필체가 은호의 눈앞을 메웠다.
[정릉동...? 거길 그 양반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시약 소실 건 때문에... 그럴 리가 없어. 완벽하게 위장했을 텐데!]
박민석의 글씨는 평소의 정갈함을 잃고 날카롭게 비틀려 있었다. 은호는 아버지가 남긴 노트의 구체적인 묘사를 이용해 쐐기를 박았다.
[아버지는 네가 용접된 폐차장 창고 문을 진흙과 녹으로 위장했다는 사실까지 이미 간파하셨어. 넌 모르는 게 하나 있지. 차량 범퍼 안쪽, 리벳과 차체가 맞물리는 그 좁은 틈새는 겉만 닦는다고 지워지지 않아. 임기태 형사를 칠 때 스며든 그 피 한 방울이 지금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일기장의 움직임이 멈췄다.
[2006년 6월 15일 밤]
경찰서 정문 근처 어둠 속. 진청색 쏘나타의 가속 페달을 밟으려던 박민석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일기장에 적힌 '틈새의 피 한 방울'이라는 문장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만약 정말 그곳에 증거가 남아 있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박민석은 핸들을 꺾었다. 아버지를 덮치려던 차체는 이제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지키기 위해 정릉동 폐차장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2026년 현재]
은호는 낡은 모텔 방 침대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일기장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세상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버지의 기일이 적힌 달력이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었다. '6월 15일 23:12 사망'이라는 명확했던 기록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며, '사망 시각 미정', '행방불명' 등의 문구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국과수 실장실. 박민석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강신우를 완벽하게 제거했다'는 확고한 기억이, 갑자기 안개처럼 흐릿해지며 낯선 이미지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박민석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신인은 광수대 내부의 끄나풀, 송창식 팀장이었다.
"강은호를 수배해. 그리고 한세아를 긴급 체포해. 강은호와 공모한 혐의다. 그 쥐새끼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해."
박민석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금테 안경 위로 광기 어린 안광이 스쳤다.
"은호야... 네가 내 과거를 망치겠다면, 나는 네 미래를 무덤으로 만들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