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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의 일기장8화

살인마의 일기장

살인마의 일기장

8화. 앞당겨진 죽음의 날

2026년의 광수대 사무실. 은호는 명패에 새겨진 임기태의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아를 살려낸 대가로 임기태가 죽었고, 세아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박민석을 은인이자 영웅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뒤틀린 현실의 무게가 은호의 어깨를 짓눌렀다.

"강 형사님, 오늘따라 왜 자꾸 멍하니 계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세아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남은 가느다란 흉터가 은호의 눈을 찔렀다. 은호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강신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아버지는 2006년 8월 14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임기태를 잃은 뒤, 아버지는 더욱 집요하게 범인을 쫓고 있을 터였다. 은호는 자료실에서 아버지 강신우의 '수정된' 수사 노트를 펼쳤다.

[2006년 6월 12일. 기태를 친 놈을 찾기 위해 대학 정문 쪽 상점가를 돌았다. 사고 시각이 늦어 목격자는 없지만, 정문 앞 편의점 주인이 이상한 말을 한다. 평소 밤마다 진청색 쏘나타를 끌고 와서 담배를 사 가던 화학과 대학원생 한 놈이 있는데, 사고 당일 이후로는 차 없이 걸어 다닌다고 한다.]

[2006년 6월 13일. 성북구 일대 공업사와 카센터 30여 곳을 전부 뒤졌다. 진청색 쏘나타 수리 기록을 대조했지만, 사고 당일 이후 범퍼나 라이트를 수리하러 온 차량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놈이 평소 애지중지하던 차를 고향에 내려보냈다는 말은 거짓이다. 차를 숨겼거나, 으슥한 곳에서 직접 고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2006년 6월 14일. 그 학생의 이름은 박민석. 놈의 실험실 동료들을 탐문했다. 차가 고장 나서 고향 집에 내려보냈다고 둘러댔단다. 하지만 렉카차 업체들까지 수소문해 봐도 해당 차량을 견인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놈이 일부러 수사망을 피해 차를 은닉했다는 확신이 든다.]

아버지는 이미 박민석의 실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은호는 이 기록을 읽으며 전율했다. '지금이라면... 지금 정보를 주면 아버지가 박민석을 먼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은호는 자취방의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그는 아버지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그리고 박민석을 압박하기 위해 일기장에 치명적인 문장을 적었다.

[박민석. 내 아버지가 이미 편의점 주인의 증언을 확보했다. 네가 사고 당일 이후 차를 숨겼다는 것도, 견인 기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아버지는 내일 인근 사설 정비소와 폐차장을 전수 조사할 거다. 네 쏘나타를 찾아내는 순간, 넌 살인범으로 체포될 거야.]

은호의 글씨가 적히자마자, 일기장에서 기분 나쁜 온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은 잉크가 거칠게 솟아오르며 박민석의 필체가 나타났다.

[알려줘서 고맙군, 강 형사. 자네 아버지가 그 편의점 주인까지 만났을 줄은 몰랐어. 역시 발로 뛰는 형사는 무섭군. 그대로 뒀다간 내일 정말 내 차가 발견되겠어. 계획을 좀 앞당겨야겠군. 꼬리가 잡히기 전에 사냥개의 발목을 먼저 분질러놓아야지. 오늘 밤, 퇴근길 골목에서 기다리겠다.]

"안 돼...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은호는 비명을 지르며 일기장을 덮으려 했지만,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소름 끼치는 진동이 그를 막아섰다.

[2006년 6월 14일 밤]

박민석은 강신우 경위의 퇴근길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옆좌석에는 은호가 일기장에 적어 보낸 문장들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석은 핸들을 쥔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흥얼거렸다.

"미래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꼴이라니... 참으로 아름다운 비극이군, 강 형사."

멀리서 강신우 경위의 낡은 지프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민석은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은호가 던진 '경고'는 박민석에게 공포가 아닌, 가장 확실한 '살해 동기'를 부여했다. 아버지가 아직 증거를 확정 짓기 전, 그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냉혹한 결단이었다.


[2026년 현재]

세상이 다시 한번 거대한 소음과 함께 재편되었다. 은호의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가며 기억의 파편들이 난도질당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 속의 달력 앱이 미친 듯이 뒤로 감기더니, 아버지의 기일이 적힌 메모가 '8월 14일'에서 '6월 15일'로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7월의 낚시터 기억, 8월의 뜨거웠던 마지막 생일 파티의 추억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대신 장대비가 쏟아지는 6월의 장례식장 풍경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제한 번호. 2026년의 박민석이었다.

"강 형사, 기억이 좀 돌아왔나? 자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야."

"네놈이... 네놈이 아버지를 죽였어. 내가 경고했는데, 어떻게..."

"아니, 은호야. 자네가 죽인 거야. 자네가 준 그 '정보'가 나에게 가장 확실한 살해 동기를 줬거든. 자네가 아버지를 잃고 평생을 괴로워하며 형사가 된 이유... 이제 알겠나? 그건 20년 전 자네가 나에게 보낸 그 일기장에서 시작된 거라네. 자네가 원인이자 결과고, 시작이자 끝이야. 완벽한 지옥이지?"

박민석은 승리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전화를 끊었다. 은호는 텅 빈 사무실 한복판에 홀로 남겨졌다. 사무실 입구에 걸린 사진 속 아버지는 이제 6월의 차가운 빗물 속에 잠겨 있었다.

"박민석... 박민석...!"

은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고, 피가 섞인 듯 번지는 잉크로 일기장 마지막 구석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창밖으로 2026년의 태양이 비웃듯 내리쬐고 있었지만, 은호의 세상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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