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의 일기장

6화. 뒤바뀐 희생자
은호는 자취방 책상 앞에 앉아 며칠째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고동색 일기장을 노려보았다. 6월 5일,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미행을 방해한 이후 일기장은 단 한 글자도 내뱉지 않았다. 박민석은 은호의 '예언'에 당혹해하기보다, 오히려 은호라는 변수를 자신의 계획에 완벽하게 편입시키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지독한 정적이었다. 그 며칠간 은호는 환청에 시달렸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구르는 만년필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황급히 수첩을 펼쳤지만 백지는 여전히 차가웠다. 박민석은 은호를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의 사냥감을 더 완벽하게 도살할 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6월 10일 아침이 밝았다. 은호가 미제팀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원래 역사대로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 사건 번호 2006-0610: 박혜진 살인 사건 보고서 ]
사망 예정일은 6월 9일에서 6월 10일로 바뀌어 있었다. 박민석은 며칠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사냥을 결정한 것이다. 은호는 이 재편된 현실 속에 숨겨진 박민석의 실수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즉시 지하 증거물 보관실로 향했다.
"동북부 사건, 박혜진 건 증거물 박스 요청합니다."
보관실 직원은 은호의 신원을 확인하더니, 파란색 플라스틱 상자를 내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방금 박 실장님도 다녀가셨는데. 강 형사님하고 요즘 자주 마주치시네요?"
은호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현재의 박민석은 이미 20년 전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은호는 상자를 들고 보관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익숙한 금테 안경의 사내, 박민석 실장과 마주쳤다.
"강 형사님. 며칠간 아주 조용하더군요. 폭풍 전야처럼."
박민석은 은호의 초췌한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뜯어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소름 끼치는 여유가 넘쳤다.
"당신이 준 정보들, 아주 유익했습니다. 덕분에 '불필요한 목격자'들을 배제하는 법을 확실히 익혔거든요. 오늘의 나는, 당신이 만든 작품이나 다름없습니다."
박민석은 은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은호는 전율했다. 박민석은 며칠간의 침묵 속에서 은호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살인 시나리오를 '완성'시킨 것이었다.
은호는 곧장 빈 취조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가방에서 꺼낸 일기장이 미친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박민석의 검은 잉크가 솟아올랐다.
[ 강은호 형사. 며칠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관찰할 게 좀 많았거든. 덕분에 오늘 밤은 아주 완벽한 사냥터가 준비됐어. 돈암동 옹벽 아래다. 이번에도 막아볼 테냐? ]
박민석의 필체에는 조롱과 흥분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은호는 이를 악물고 펜을 쥐었다. 아버지가 남긴 수사 일지 속, 6월 10일 밤의 기록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 박민석. 네가 지금 숨어 있는 그 옹벽 구간은 부랑자 신고로 순찰차가 지나갈 거야. 넌 경찰에게 얼굴이 노출될 거야. ]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수첩 너머에서 박민석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리는 듯했다.
[2006년 6월 10일 밤, 성북구 돈암동]
장대비가 쏟아지는 옹벽 아래, 박민석은 무성하게 자란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박혜진의 발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품 안의 일기장이 미세하게 떨리며 뜨거워졌다.
민석은 일기장을 꺼내 은호의 문장을 읽었다. 그의 눈동자에 기괴한 안광이 스쳤다.
'부랑자 신고... 순찰차...?'
그때였다. 은호의 말대로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경찰차의 경광등 빛이 어둠을 가르며 옹벽 쪽으로 다가왔다. 민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풀숲 깊숙이 몸을 낮췄다.
"내 설계를 이렇게 망쳐놓다니. 정말 대단하군, 강 형사."
민석은 거침없이 옹벽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그에게 박혜진이라는 목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급한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미래의 목소리'에게 보란 듯이 승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강 형사. 네가 말한 그 견고한 기록은 결국 '계획된 살인'에 대한 것이지. 그렇다면, 아무런 예고도 계획도 없는 '순수한 우연'에 의한 살인은 미래에 어떤 파동을 일으킬까."
그는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근처, 노란 우산을 쓰고 골목으로 들어서는 어린 소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석은 소녀의 뒤를 따르며 주머니 속의 칼날을 매만졌다.
"네가 지킨 그 여자 대신, 이 아이를 나의 첫 번째 실험체로 삼아주마. 기록되지 않은 죽음이 네 세상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똑똑히 지켜봐."
세상이 거대하게 뒤틀리는 소리가 은호의 고막을 찢어발겼다. 삐-, 하는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책상 위의 서류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의 이름들, 그리고 은호의 머릿속 기억들이 강제로 뜯겨나가며 재편되었다.
은호는 비명을 지르며 취조실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만 개의 바늘이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강 형사, 정신 차려! 갑자기 왜 이래?"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목소리에 은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임기태 경감이 서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은호의 멘토이자 파트너였던 그였다.
"반장님…… 세아 씨는요? 한세아 경위 어디 갔습니까?"
은호의 갈라진 물음에 임 경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은호의 어깨를 짚었다.
"한세아? 너 진짜 피곤한 모양이구나. 한세아는…… 20년 전 사건 발생일에 죽은 어린 소녀잖아. 네 동료 한세아 경위라니,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은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 위의 노트북으로 달려갔다. 미제 사건 데이터베이스의 로딩 속도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 사건명: 동북부 연쇄살인 사건 ]
[ 제1차 피해자: 한세아 (사망 당시 12세) ]
[ 발생일: 2006년 6월 10일 ]
주머니 속 일기장에서 묵직한 진동과 함께 박민석의 서늘한 조롱이 배어 나왔다.
[ 강은호 형사. 네 덕분에 아주 쉬운 제물을 찾았어. 고맙다, 은호야. ]
은호는 비명을 지르며 화면을 가렸다. 자신이 구한 한 명의 생명이, 가장 아끼던 동료의 어린 시절을 앗아갔다는 참혹한 진실 앞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