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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의 일기장5화

살인마의 일기장

살인마의 일기장

5화. 위험한 내기

자취방의 공기는 납처럼 무거웠다. 은호는 땀으로 젖은 시트 위에 몸을 웅크린 채, 책상 위에서 식어가는 고동색 일기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살렸다는 안도감은 찰나였고, 그 대가로 살인마의 증거를 직접 지워주었다는 역겨운 죄책감이 그를 쉼 없이 난도질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향했다. 일기장을 펼치자, 이미 말라버린 검은 잉크가 승리자의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 ... 이제 넌 나에게 빚을 졌어. ... ]

은호는 펜을 쥐었지만, 차마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자신이 적는 문장 하나가 과거를 어떻게 뒤틀지, 또 어떤 괴물을 완성할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수첩이 기분 나쁜 진동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마치 은호의 망설임을 비웃듯, 2006년의 박민석이 먼저 문장을 써 내려갔다.

[ 강은호 형사. 네가 세탁소 영감을 통해 내 살인을 방해했을 때, 난 깨달았다. 너라는 존재는 내 작품을 망치는 방해꾼이 아니라, 내 설계를 완벽하게 다듬어줄 최고의 '오답 노트'라는 것을. ]

잉크 냄새가 소독약 냄새처럼 코끝을 찔렀다. 민석의 필체는 광기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 그래서 게임을 하나 제안하지. 룰은 간단해. 내가 새로운 사냥감을 사냥하기 전에, 네가 먼저 내 동선을 예측해서 방해해 봐. 만약 네가 내 계획의 맹점을 찾아낸다면, 난 기꺼이 그날의 사냥을 포기하고 계획을 수정하겠다. ]

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인을 멈추겠다는 제안.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다.

[ 하지만 명심해. 2006년의 경찰들에게 정보를 흘리는 비겁한 짓을 하면, 난 즉시 판을 엎을 거다. 그 여자가 아닌, 네가 아끼는 다른 사람을 오늘 밤 바로 찾아가서 찢어발기겠어. ]

이것은 사냥꾼이 먹잇감을 데리고 노는 놀이였다. 은호는 분노로 볼펜을 꽉 쥐었다. 박민석은 은호를 '살인을 막으려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스승'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 내일 오후 3시, 난 새로운 사냥감을 처음으로 미행할 예정이다. 네가 정말 미래의 기록을 보고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을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지. 어디 한 번 증명해봐. ]


은호는 비틀거리며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비닐에 싸인 낡은 업무 수첩 하나를 꺼냈다. 아버지 강신우 경위의 유품이었다. 은호는 침을 삼키며 6월 9일 박혜진 사망 사건 이후의 기록을 넘겼다. 아버지가 피해자의 생전 동선을 파헤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남긴 거친 필적들이 나타났다.

[ 6/10. 박혜진 동선 추적. ]
[ 6/5 15:00. 마로니에 분수대. 검정 바람막이. ]
[ 순찰 오토바이 - 검문 직전 놓침. ]

짧고 투박한 메모. 하지만 은호에게는 그 어떤 수사 보고서보다 명확한 지도였다. 아버지는 6월 5일, 박민석이 처음으로 사냥감을 미행했던 그 찰나의 흔적을 놓친 것을 기록해두었다.

은호는 볼펜을 쥐고 일기장에 아버지가 남긴 키워드를 박민석에게 던졌다.

[ 그곳은 마로니에 공원 분수대다. 네가 미행을 시작하자마자 순찰 오토바이와 마주쳐 쥐새끼처럼 도망쳤던 곳이지. 수사 기록은 네 그 비겁한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이번에도 넌 거기서 사냥감을 놓쳐야 한다. ]

사실과 기록을 섞은 필사적인 블러핑이었다. 하지만 일기장에서 돌아온 박민석의 답장은 은호의 기대를 비웃듯 차갑게 번졌다.

[ 고맙군, 강 형사. 덕분에 그 순경 놈과 마주쳐서 '작업'을 망치는 일은 없겠어. 네가 알려주는 미래의 오답들이 내 설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내일은 더 재미있는 시험을 준비하지. 기대해, 은호야. ]


다음 날 아침, 경찰청 광수대 사무실.

"강 형사님, 아까부터 누구 이름을 그렇게 검색하는 거예요? 김윤아? 우리 미제 사건 명단에는 그런 이름 없는데요?"

파트너 한세아 경위의 물음에 은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6월 3일 삼선동 사건 피해자였던 김윤아. 하지만 2026년의 현실에서 김윤아라는 이름은 깨끗이 씻겨 내려가 있었다. 은호는 그녀를 살렸지만, 세상은 그녀를 망각했다.

화장실 칸막이 안, 은호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거친 잉크가 백지 위로 배어 나오며 박민석의 조롱이 시작되었다.

[ 강 형사. 이제부터 정식 게임이다. 네가 내 계획의 맹점을 찾아낼 때마다, 난 범행을 하루씩 늦춰주마. 박혜진은 하루 더 살겠지만, 그 하루 동안 그녀가 겪을 공포는 네 덕분에 배가 될 거야. ]

박민석은 은호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살인을 더 예술적으로 다듬으려 하고 있었다. 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 돈암동 한신아파트 103동 뒤편 샛길. 원래 역사에서 넌 옹벽 그늘을 이용하려다 순찰 중인 경비원과 마주치지. 오늘 밤 11시, 그곳은 네 사냥터가 아니라 쥐덫이 될 거다. 포기해. ]

은호는 다시 한번 수사 기록상의 실패 요인을 던져 도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장은 은호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 좋아 덕분에 구멍 뚫린 계획을 보완할 기회를 얻었어. 약속대로 박혜진의 사냥은 하루 늦추지. 그동안 난 경비원의 눈을 피할 더 완벽한 사각지대를 찾아낼 거다. 고맙군, 은호야. 넌 정말 쓸모 있어. ]

은호는 일기장을 덮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구토감이 밀려왔다. 박혜진을 살리기 위해 던진 단서가, 결국 박민석에게 '경비원의 순찰 시간과 동선을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꼴이 되었다.

그는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정의를 위해 펜을 들었다고 믿었지만, 거울 속의 남자는 어느새 살인마의 공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이 낡은 수첩은, 이제 은호의 목을 옥죄는 거대한 사슬이 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은호의 낮은 흐느낌이 타일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창밖에는 다시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일기장은 여전히 기분 나쁜 온기를 내뿜으며 다음 '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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