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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의 일기장3화

살인마의 일기장

살인마의 일기장

3화. 시스템 위의 포식자

식은땀으로 젖은 시트 위로 몸을 일으켰다. 창밖엔 여전히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대기 중의 습도는 어젯밤과는 미묘하게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은호는 비틀거리며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창천동 박혜진 사건......"

경찰 내부망에 접속하자, 어젯밤 일기장을 덮은 직후 보았던 그 참혹한 이름이 다시 한번 화면을 가득 채웠다.

[ 사건번호 2006-0609: 창천동 여대생 살인사건 ]
[ 피해자: 박혜진 (사망) ]
[ 특징: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 전무. 주도면밀한 계획범죄. ]

원래 역사에서 1차 피해자였던 '김윤아'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호의 경고로 인해 박민석은 사냥을 멈춘 것이 아니라, 더 완벽한 장소와 시간을 골라 사냥감을 바꾼 것이었다. 은호가 던진 선의가 박민석이라는 괴물을 진화시켰고, 그 결과 20년 뒤의 현재는 더 정교하게 뒤틀려 있었다.

경찰청 광수대 미제팀 사무실에 들어서자, 평소와 다름없는 소음이 은호를 맞이했다.

"강 형사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해요? 어제 또 잠 못 잤죠?"

파트너 한세아 경위가 서류 뭉치를 든 채 다가왔다.

"정신 차려요. 오늘 대한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분석실장님이 직접 브리핑 오시는 날이잖아요. 이름이 뭐였더라... 아, 박민석 실장님."

'박민석'이라는 이름이 세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은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흔한 이름이잖아. 국과수 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 일기장의 주인일 리가 없어.'

은호는 책상 구석에 놓인 과학수사 전문 서적을 집어 들었다. [ 현대 범죄의 재구성 - 저자 박민석 ]. 저자 약력을 훑어내려 가던 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 학력: 한국대학교 화학과 학사, 동 대학원 석·박사 ]

은호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브리핑실 내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호는 맨 뒷자리에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손바닥엔 어느새 축축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박 실장님 오십니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말끔한 남색 슈트에 지적인 금테 안경,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중년 신사. 그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단상에 올라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대한과학수사연구원 분석실장 박민석입니다."

은호는 숨을 멈추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박민석은 능숙하게 레이저 포인터를 조작하며 2006년 박혜진 사건의 증거 사진들이 나열된 화면을 띄웠다.

"이 사건이 미제로 남았던 건 범인이 현장을 '화학적으로 오염'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성분을 분석해 범인이 어떤 의도로 증거를 인멸했는지 재구성해냈습니다."

박민석의 설명은 완벽했다. 현장 감식 자료의 접근 권한, 오래된 보고서에 남은 시약 반응표, 경찰 내부 자문 회의에서 축적한 기록들이 모두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분석'하여 정답을 알려주는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은호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그를 응시했다. 박민석이 가리키는 그 모든 '완벽한 수사 기법'은, 사실 은호가 일기장을 통해 그에게 던졌던 정보들이 그에 의해 진화한 결과물이었다. 은호의 선의가 그를 잡는 단서가 아니라, 그를 법과 시스템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 셈이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저 서늘한 총기, 그리고 전공의 일치. 은호는 이제 확신했다. 동명이인의 우연 같은 건 없었다. 일기장 너머에서 조롱하던 그 살인마는, 20년의 세월을 타고 시스템의 정점에 서서 은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세아는 은호의 팔을 잡아끌며 박민석에게 다가갔다.

"아, 이쪽은 광수대 미제팀 강은호 형사입니다. 실장님 팬이에요."

세아의 소개에 박민석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강은호 형사님...... 성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은호는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평범했다. 은호는 박민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실장님께서는... 20년 전에도 화학을 전공하셨더군요. 혹시 삼선동 쪽에 사신 적이 있습니까?"

순간, 박민석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은호의 손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꽉 쥐어 제자리로 고정시킨 뒤, 주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펜 소리가 꽤 시끄럽더군요. 20년 전에도, 어젯밤에도."

은호의 전신이 일순간 마비된 듯 얼어붙었다. 박민석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강 형사가 던져준 그 수많은 '오답'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겠지."

박민석은 은호의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세아에게 목례를 건넸다.

"강 형사님은 눈빛이 참 집요하시네요. 훌륭한 형사가 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분석실에서 다시 뵙죠."

그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브리핑실을 빠져나갔다. 은호는 그가 사라진 문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박민석은 은호를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곁에 두고, 자신이 완성한 '완벽한 세계'를 지켜보게 만들며 고문하려 하고 있었다.

가방 속 일기장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구조 신호가 아니었다.
현재의 괴물이 은호에게 보내는 가장 잔혹한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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