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대공과의 이혼은 거절합니다

49화 접힌 문서의 무게
황태후궁의 상자는 치료실 안에서 치워지지 않았다.
카시안은 그것을 치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치우는 순간 저 문서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자 표면에 남은 검은 빛은 아직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대체 혼인 절차 개시
대공비 공석 예정
두 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잉크가 마르듯 멎어 있을 뿐이었다.
로젤리는 그 문장을 그대로 적고 있었다. 셰라는 상자의 위치와 열린 각도, 치료실 문성과의 거리를 기록했다. 아르웬은 문 앞에 서서 전령들이 안쪽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
마르바 라운만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하. 대공비 전하의 개인 계획을 확인하지 않으면 황태후궁의 다음 문구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기록해라."
카시안이 말했다.
로젤리의 펜이 멈추지 않았다.
"마르바 라운은 황태후궁 문서의 반응 직후 대공비의 사전 계획과 이혼 서류 확인을 권했다."
마르바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안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말도 기록해라."
"전하."
"안전이라는 말로 에리나의 의사를 먼저 열지 않는다."
치료실 안쪽에서 미나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가림막 너머 에리나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손끝의 금빛은 꺼지지 않았지만 밝아지지도 않았다.
카시안은 그 빛을 보았다. 저 작은 빛 때문에 황태후궁의 문서가 반응했다. 저 작은 빛 때문에 대공성의 오래된 문성이 버텼다.
그리고 저 작은 빛 때문에 누군가는 에리나의 이름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려 했다.
"황태후궁 전령은 대기실 밖으로 물린다. 접견실 안쪽 복도는 봉쇄하고 치료실에 접근한 자의 이름을 모두 남겨라."
"예."
아르웬이 바로 움직였다.
카시안은 상자 안쪽에 남은 검은 문구를 다시 보았다. 에리나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문구는 그녀의 자리를 뺏고 있었다.
그때 셰라가 낮게 말했다.
"전하. 대공비 전하의 방 보관 목록을 다시 확인하던 중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돌아갔다.
"말해."
"보관함 맨 아래 칸 안쪽에 접힌 문서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겉면에는 글자가 없습니다. 미나가 발견했고 아직 꺼내지 않았습니다."
미나가 가림막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전하. 그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비 전하께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라고 하셨던 물건일 수 있습니다."
치료실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마르바가 곧장 한 걸음 나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확인해야 합니다. 황태후궁 문서가 대공비 전하의 계획을 이용하고 있다면 이미 개인 물건의 범위를 넘었습니다."
카시안은 미나를 보았다. 미나는 겁먹은 얼굴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나."
"예."
"그 문서가 봉인되어 있었나."
"아닙니다. 끈으로 묶인 것도 아니고 봉랍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관함 뒤쪽 천 아래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꺼내지는 않았고."
"예. 셰라 님께 위치만 말씀드렸습니다."
카시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열면 알 수 있다.
에리나가 어디로 가려 했는지, 누구에게 대공성의 약초 정원을 맡기려 했는지,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조건 뒤에 무엇을 적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열 수 없었다.
"방으로 간다."
마르바가 따라붙었다.
"전하. 이번에는 제가 입회해야 합니다."
"입회는 허락한다. 해석은 허락하지 않는다."
"무슨 뜻입니까."
"그 문서의 겉면과 보관 상태만 기록한다. 내용은 열람하지 않는다."
마르바가 입술을 다물었다. 카시안은 그를 지나쳐 문으로 걸었다.
치료실 문성이 그의 뒤에서 낮게 울렸다. 마치 누군가의 숨이 얕아지는 소리 같았다.
에리나의 방은 조용했다.
창가의 말라 가던 약초 화분은 미나가 물을 준 덕에 조금 살아 있었다. 침대 곁 작은 탁자 위에는 에리나가 쓰던 연필과 접은 천 조각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 방은 떠날 사람의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겨 둔 사람이 많아서였다.
미나가 보관함 앞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떨려 잠금쇠를 두 번 놓쳤다. 셰라가 옆에서 조용히 받쳐 주었다.
"천을 먼저 들겠습니다."
셰라가 말했다.
"기록해라. 보관함 하단 뒤쪽, 약초 기록 묶음 아래, 회색 천 한 겹. 외부 봉인은 없음."
로젤리가 문가에서 받아 적었다.
천이 들렸다.
그 아래에 낡은 종이가 있었다. 몇 번이고 접었다 편 자국이 깊게 남은 문서였다. 겉면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대신 모서리 한쪽에 얇은 실 자국이 있었다.
미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저 매듭..."
"아는가."
"약초 기록에 쓰시던 방식입니다. 중요한 배합표를 다른 기록과 섞이지 않게 묶을 때 쓰셨습니다."
카시안은 손을 뻗지 않았다.
종이는 아주 얇았다. 누군가가 급히 펼치면 접힌 부분부터 찢어질 것 같았다. 에리나는 이것을 숨겼다. 하지만 봉인하지 않았다.
숨긴 것과 맡긴 것 사이.
카시안은 그 경계 앞에 섰다.
마르바가 낮게 말했다.
"전하. 봉인이 없다면 법적으로 열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는 말과 해야 한다는 말은 다르다."
"대공비 전하가 정상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이용해 대신 판단하지 않는다."
마르바가 다시 말하려 했다.
카시안은 그보다 먼저 로젤리에게 말했다.
"기록해라. 카시안 발레리우스는 대공비 에리나 발레리우스의 방에서 접힌 문서 한 부를 발견했다. 외부 봉인은 없으나 은닉 상태였고 대공비의 사전 동의가 없으므로 내용 열람을 보류한다."
로젤리의 펜 끝이 달렸다.
"보존 봉투를 가져와라. 투명 봉투가 아니라 두꺼운 종이 봉투다. 겉면에는 발견 위치와 시간을 적고 주인은 에리나 발레리우스라고 표기한다."
"예."
"누구도 펼치지 않는다."
마르바가 시선을 내렸다.
미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전하."
"말해."
"대공비 전하께서... 정말 떠나려 하셨을까요?"
그 질문은 방 안을 천천히 지나갔다.
카시안은 접힌 문서를 보았다.
그는 그 질문에 답할 자격이 없었다. 에리나가 깨어난다면 그녀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그녀가 떠나려 했다면 그는 그 이유를 들어야 했다. 막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다.
"살아남으려 하셨다."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 이상은 내가 정하지 않는다."
방 안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순간 치료실 쪽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아르웬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전하. 대공비 전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카시안은 보관함 앞에서 바로 돌아섰다. 접힌 문서는 아직 천 위에 있었다.
"봉투에 넣어라. 미나와 셰라가 보는 앞에서만. 나는 돌아와서 봉인을 확인한다."
"예."
그는 방을 나갔다.
치료실 가림막 안쪽은 더 어두워 보였다.
에리나는 완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눈꺼풀은 반쯤 열렸고 시선은 흔들렸다. 그래도 카시안이 다가가자 그녀는 그를 알아보려 애썼다.
"카...시안..."
그 이름 하나가 그의 가슴을 너무 쉽게 흔들었다.
카시안은 침대 곁에 멈췄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잡지 않았다. 에리나가 먼저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여기 있다."
에리나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
"문서..."
미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카시안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네 방에서 접힌 문서가 발견됐다."
에리나의 손끝 금빛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열었...어요?"
"아니."
그녀의 눈에 맺힌 긴장이 조금 풀렸다. 풀린 만큼 다른 고통이 올라왔다.
카시안은 그 표정을 보고 목 안쪽이 타는 것 같았다.
"왜 숨겼는지 묻고 싶다. 어디로 가려 했는지도 묻고 싶다. 하지만 지금 묻지 않겠다."
에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서는 네 이름으로 보존한다. 네가 직접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구도 열지 않는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건..."
카시안이 몸을 낮췄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버리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 말이 너무 작아서 모두가 숨을 멈춰야 했다.
"누군가를 버리려고 쓴 게 아니에요."
에리나는 아주 힘겹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도... 대신 죽지 않게 하려고..."
그 뒤의 말은 흐려졌다.
카시안은 그 문장이 몸 안쪽 깊은 곳을 베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대신 죽지 않게.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려고 길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대공성을 버리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대공성의 약초와 사람과 문성이 멈추지 않게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추측이었다.
카시안은 그 추측을 기록으로 만들지 않았다.
"알았다."
그는 낮게 말했다.
"그 말도 네가 깨어나 다시 말할 때까지 해석하지 않는다."
에리나가 아주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눈가에 맺힌 빛이 다시 얕아졌다.
"대공님..."
"응."
"문..."
"어떤 문."
에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의 금빛이 잠깐 문 쪽으로 기울었다가 사라졌다. 미나가 급히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
"다시 잠드셨습니다."
카시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문.
에리나가 말한 것이 치료실 문인지, 자신의 방 문인지, 계약서의 조항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므로 그는 정하지 않았다.
그때 복도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르웬이 들어왔다.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전하. 황태후궁 전령이 정식 명령서를 다시 내밀었습니다."
"문구."
"대공비 지위 임시 정지 심의."
치료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르바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로젤리의 손이 멈췄다. 셰라는 가림막 너머 에리나의 손을 먼저 확인했다.
카시안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그들이 결국 여기까지 왔다.
공석 예정이 아니라 지위 정지.
에리나가 숨을 쉬고 있는데도, 그녀의 손끝 빛이 아직 대공성의 문성을 붙들고 있는데도, 황태후궁은 그녀의 자리를 먼저 끊으려 했다.
"전령은 접견실에 들이지 않는다."
"예."
"명령서는 보존실 앞 복도에서 받는다. 치료실에 들이지 말고 대공비의 반응을 확인하려 하지 못하게 막아라."
아르웬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리나의 접힌 문서는."
"봉투에 넣어 발견 위치와 시간을 적었습니다. 아직 봉인 전입니다."
셰라가 대답했다.
"가져와라."
마르바가 눈을 들었다.
"전하. 황태후궁 명령이 도착한 이상 그 문서가 대공비 전하의 지위와 관련된 증거라면..."
"그래서 더 열지 않는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낮았다.
"황태후궁이 에리나의 자리를 비우려 하는 지금, 내가 가장 먼저 그녀의 문서를 열면 무엇이 남지."
마르바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자리부터 빼앗는 사람과 내가 무엇이 다르지."
셰라가 두꺼운 보존 봉투를 가져왔다. 겉면에는 에리나 발레리우스 개인 문서. 방 보관함 하단 뒤쪽에서 발견. 내용 미열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시안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는 가벼웠다.
그런데 손목이 내려앉을 만큼 무거웠다.
"봉인해라."
셰라가 봉랍을 녹였다. 붉은 밀랍이 봉투 끝에 떨어졌다. 카시안은 대공가의 인장을 들었다가 멈췄다.
그의 인장이 찍히면 이것은 대공의 보관물이 된다.
그는 미나를 보았다.
"에리나가 쓰던 약초 기록 인장이 있나."
미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목인장이 있습니다. 정원 기록에 쓰시던..."
"가져와라."
미나는 거의 뛰듯 다녀왔다. 작은 나무 인장에는 약초 잎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시안은 그것을 받아 봉랍 위에 눌렀다.
잎 문양이 남았다.
"기록해라."
로젤리가 다시 펜을 들었다.
"접힌 문서는 대공의 명령으로 보존하되 소유와 열람 권한은 에리나 발레리우스에게 둔다. 봉인은 대공가 인장이 아니라 대공비가 사용하던 약초 기록 인장으로 한다."
"기록했습니다."
"이제 황태후궁 명령서를 받는다."
카시안은 봉투를 셰라에게 돌려주었다.
"이 문서는 치료실에 두지 않는다. 보존실 안쪽 두 번째 금고에 넣어라. 황태후궁 문서와 다른 칸이다. 두 문서는 서로 닿지 않게 한다."
"예."
복도로 나서자 대공성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하인들은 벽 가까이 물러서 있었고 기사들은 말없이 창가를 막았다. 접견실 쪽에서 온 전령들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처럼 서 있었다.
대공성은 오랫동안 병든 성이었다. 괴물의 밤마다 숨을 죽였고 검은 비늘이 복도를 스치면 모두가 눈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복도를 누르는 침묵은 그때와 달랐다.
누구도 괴물을 기다리지 않았다.
모두가 황태후궁의 문장을 기다렸다.
보존실 앞에서 에커리 몬르디아가 새 명령서를 내밀었다.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 거슬렸다.
"황태후 전하의 정식 명령입니다. 대공비 전하의 지위 임시 정지 심의와 대체 배우자 예비 명단 열람..."
"거기까지."
카시안이 말했다.
에커리가 입을 다물었다.
"전달자는 문서 겉면만 읽는다. 본문은 보존관이 열람 위치를 기록한 뒤 확인한다."
"전하. 황태후 전하께서는 즉시 답신을..."
"황태후궁은 즉시 답신을 받을 것이다."
카시안은 명령서를 받지 않았다. 아르웬이 장갑 낀 손으로 문서를 받아 보존 천 위에 올렸다.
"답신 첫 줄도 기록해라."
로젤리가 펜을 들었다.
카시안은 치료실 쪽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에리나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에리나 발레리우스는 대공성에 살아 있다."
펜 끝이 종이를 긁었다.
"대공비의 지위는 황태후궁의 예비 절차로 정지되지 않는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카시안은 이어 말했다.
"그녀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 그녀의 문서도, 그녀의 자리도, 그녀의 이름도 대체하지 않는다."
그 말이 보존실의 닫힌 문 앞에 박혔다.
그리고 황태후궁 명령서의 검은 봉인이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마치 안쪽에서 누군가가 대답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