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대공과의 이혼은 거절합니다

30화: 치료라는 이름의 입회
엔반 레하르의 통지서는 젖은 천 위에서도 마르지 않았다.
검은 글자는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더 또렷해졌다.
대공 전담 치료관 자격 확인 및 긴급 진료 입회 요청.
문장만 보면 의무에 가까웠다. 거절하면 대공성이 치료를 막았다는 기록만 남을 수 있었다.
세리아나는 통지서 옆에 로젤린의 황실 입회 사본을 놓았다.
"순서를 바꿉니다. 진료가 아니라 자격 확인이 먼저예요."
카시안은 정문 쪽을 보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아직 검은 비늘이 얇게 남아 있었다.
"돌려보내면 된다."
"그러면 거절 기록만 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전하가 치료를 거절했다는 문장일 수 있어요."
그의 손이 천천히 말렸다.
"내가 버티지 못하면."
"그때도 전하가 먼저 말해 주세요. 어디가 아픈지, 무엇을 맡았는지, 언제부터 변했는지."
카시안은 그녀를 오래 보았다.
"내 두려움까지 적겠다는 말인가."
"전하가 허락한다면요."
그 말에 그의 눈빛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으로 남기겠다는 뜻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사본 위에 손을 얹었다.
"황실 입회 사본은 여기 둡니다. 치료관 입회 요청이 들어와도 제 사본은 물리지 않습니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반의 물품은 모두 분리 검열합니다. 봉인함, 약재, 주사관, 향낭. 무엇이든 전하에게 닿기 전에 약초 잎과 젖은 흙으로 반응을 봅니다."
미나가 젖은 천을 새로 깔았다. 헬라는 문간의 하녀들을 물렸고 아르덴은 정문에서 온 파발 봉인을 다시 확인하러 나갔다.
문밖에서 새벽 전 종이 울렸다.
엔반 레하르는 통지서보다 조용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키가 크지 않았고 회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망토 안쪽에는 황도 치료원 문장이 수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 끝에는 검은 밀랍이 아주 작게 묻어 있었다.
"대공 전하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들었습니다."
엔반은 먼저 카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세리아나는 그 인사를 지나치지 않았다.
"대공비 전하 앞에서 말하세요."
엔반의 시선이 그녀에게 왔다. 놀람은 짧았다.
"대공비 전하. 저는 황도 치료원의 위임을 받아 대공 전하의 발작 징후를 확인하고 긴급 진료에 입회하려 왔습니다."
"입회하려 왔습니까. 진료하려 왔습니까."
"두 절차는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눠야 합니다."
세리아나는 로젤린에게 손짓했다.
"첫 기록. 엔반 레하르는 진료와 입회를 분리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엔반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대공 전하의 병증은 지체할 수 없습니다. 황실 서기관의 입회는 치료 후에도 가능합니다."
로젤린의 펜이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기록. 엔반 레하르는 황실 입회를 치료 후로 미룰 수 있다고 진술했다."
카시안의 입가가 굳었다. 세리아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분노를 보는 순간 엔반에게도 그 흔들림이 보일 터였다.
"봉인함을 여세요. 직접 열지 말고 탁자 위에 놓으세요."
엔반은 순순히 봉인함을 내려놓았다. 아르덴이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세리아나가 먼저 손을 들었다.
"쇠붙이는 가까이 대지 않습니다. 미나."
미나가 젖은 천 위에 약초 잎을 폈다. 잎 끝은 봉인함의 왼쪽 모서리를 향해 검게 물들었다.
엔반은 설명하듯 말했다.
"진정 향낭입니다. 괴수화 징후가 올라오는 환자에게 가장 먼저 쓰는 물건입니다."
"열지 마세요."
"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열기 전에 반응을 기록합니다."
세리아나는 잎의 끝을 보았다.
"향낭을 향해 약초 잎 반응. 사람을 향하지 않음."
미나가 함을 열었다. 안에는 은빛 가루가 묻은 작은 향낭, 검은 밀랍으로 봉한 주사관, 금서고 표식을 닮은 얇은 금속패가 있었다.
헬라가 숨을 삼켰다.
"치료원 물품에는 금서고 표식이 붙지 않습니다."
엔반은 여전히 차분했다.
"저주는 병이면서 봉인 문제입니다. 금서고 위임 없이는 대공 전하의 병증을 다룰 수 없습니다."
세리아나는 금속패 아래에 젖은 천을 밀어 넣었다. 검은 글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입회 교체 및 발작 확인.
로젤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세리아나는 곧장 말했다.
"기록하세요. 치료 물품 봉인함 안쪽에서 입회 교체 및 발작 확인 문구 확인."
엔반이 처음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 문구는 치료관 안전 절차입니다."
"치료관 안전 절차라면 왜 봉인함 안쪽에 숨겼습니까."
대답이 오기 전 향낭의 매듭이 스스로 풀렸다.
단향이 얇게 번졌다.
카시안의 어깨가 흔들렸다. 검은 비늘이 목덜미에서 턱 아래까지 올라왔다. 손끝이 길어지고 발톱이 바닥을 긁었다.
엔반이 즉시 말했다.
"발작입니다. 즉시 치료관 입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아직 아닙니다."
세리아나는 카시안을 보았다.
"전하. 언제부터입니까."
카시안의 숨이 거칠었다.
"향낭이 풀린 뒤."
"어디가 먼저 아팠습니까."
"목덜미. 그다음 손끝."
"무엇을 맡았습니까."
"단향. 예전 처방과 같은 냄새."
엔반이 한 걸음 다가왔다.
"환자는 진술할 상태가 아닙니다."
카시안이 그를 보았다. 눈동자는 검었지만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내가 말한다."
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
세리아나는 낮게 말했다.
"기록하세요. 대공 전하는 향낭 개방 직후 목덜미 통증과 손끝 변화를 직접 진술했다. 단향은 예전 처방과 같다고 진술했다."
검은 뿌리가 바닥 틈에서 올라왔다.
이번에도 사람을 먼저 향하지 않았다. 뿌리는 향낭과 검은 밀랍 주사관을 향해 움직였다. 카시안은 그 앞에 섰다.
"사슬은."
아르덴이 묻기도 전에 카시안이 답했다.
"들여오지 마라."
엔반의 눈이 좁아졌다.
"사슬 없는 발작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했습니까."
세리아나가 물었다.
엔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나가 젖은 흙을 얇게 뿌리자 뿌리의 속도가 늦어졌다. 세리아나의 손목 반점이 리본 아래에서 따끔거렸다. 뜨겁지는 않았다. 방향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은 카시안이 아니라 주사관의 검은 밀랍을 향했다.
"반점 반응. 주사관 밀랍 쪽. 정화 반응으로 단정하지 않음."
로젤린이 받아 적었다.
엔반의 시선이 세리아나의 손목에 닿았다.
"대공비 전하께도 반응이 있군요."
"기록된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입회자가 아니라 치료 대상일 수 있습니다."
카시안의 발톱이 바닥에 박혔다.
세리아나는 그보다 먼저 말했다.
"그 문장도 기록하세요. 엔반 레하르는 대공비의 반점 반응을 이유로 입회 자격을 문제 삼았다."
엔반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위험 요인이 입회하면 치료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위험 요인을 먼저 밝힌 쪽은 당신입니다. 그리고 제 반점은 치료 서식이 아니라 당신의 주사관 밀랍에 반응했습니다."
세리아나는 사비에의 옛 하부문 서식을 가져오게 했다. 사비에는 문가에서 떨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읽으세요."
사비에가 낡은 서식을 더듬었다.
"하부문 회수 입회자는 치료관 또는 금서고 위임자로 대체 가능."
세리아나는 엔반의 금속패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에는 입회 교체 및 발작 확인."
로젤린이 황실 보존 인장을 들었다.
"황실 입회는 아직 유효합니다."
엔반은 차갑게 말했다.
"황실은 대공 전하의 병을 오래 방치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당신의 물품이 발작보다 먼저 반응한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카시안의 숨이 한 번 끊겼다. 검은 비늘이 얼굴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세리아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향낭과 주사관 앞에서 버텼다.
"세리아나."
그가 낮게 불렀다.
"여기 있다."
"나도 무섭다."
그 고백은 방을 찢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뿌리의 속도를 늦췄다.
세리아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기록하세요. 대공 전하는 공포를 진술했으나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증거 앞을 막고 있다."
로젤린이 인장을 눌렀다. 붉은 밀랍이 사본 위에서 굳었다.
검은 뿌리가 한 번 비틀렸다. 향낭의 천이 갈라지고 안쪽에서 작은 금속 조각이 떨어졌다. 미나가 젖은 천으로 그것을 덮었다.
글자가 떠올랐다.
반점 보유자 확인 후 동시 회수.
세리아나의 손목이 이번에는 확실히 욱신거렸다.
카시안이 움직이려 했다.
"오지 마세요."
그가 멈췄다. 멈추는 데 성공했다.
세리아나는 자기 리본을 풀지 않았다. 대신 손목을 탁자 위에 올렸다.
"기록하세요. 반점 보유자라는 문구가 엔반의 향낭 내부 금속 조각에서 확인됐다. 대공비의 반점은 해당 문구와 같은 박자로 통증을 보였다. 정화 능력 사용 없음."
엔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평온이 벗겨졌다.
"그 기록은 전하께도 위험합니다."
"그래서 남깁니다."
카시안이 그를 향해 말했다.
"네 치료는 나를 숨기게 만들었다."
엔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숨기지 않는다."
아르덴이 엔반의 봉인함을 닫았다. 헬라는 문밖의 하녀들에게 누구도 방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세리아나는 마지막으로 금속패와 사비에의 서식을 나란히 놓았다.
"엔반 레하르의 치료 물품은 대공 전하의 발작 징후보다 먼저 회수 반응을 일으켰다. 치료관 입회 요청은 황실 입회 교체 절차와 연결된다. 대공 전하는 사슬 없이 증거 앞을 막았고 자신의 증상을 직접 진술했다."
로젤린이 적었다.
엔반은 입을 열었다.
"저를 막으면 다음 발작 때 대공 전하는 죽을 수 있습니다."
카시안이 그를 보았다.
"그 말도 기록해라."
세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새벽이 창문 아래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직 밤이 끝나지 않았다.
엔반의 봉인함 바닥에서 마지막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회수 실패 시 반점 보유자를 우선 확보.
카시안의 눈이 세리아나의 손목으로 향했다.
이제 그들이 치우려는 사람은 입회자만이 아니었다.